한국 화교선교, 그 100년의 역사를 되짚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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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화교선교, 그 100년의 역사를 되짚다
  • 김동근 기자
  • 승인 2012.08.14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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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한중화기독교, 지난 11일 정동 한성교회서 기념 세미나 개최

▲ 여한중화기독교총연합회는 지난 11일 정동 한성교회에서 한국 화교교회 100주년 세미나를 열었다.
한국에 화교 교회가 설립 된지 100년이 지났다. 한국에 거주하는 중국인들을 위한 화교 교회. 당시 국내에 거주하고 있던 중국인은 약 1만7천여 명으로 그 중 약 2천500명이 서울에, 1천500명이 인천의 제물포에 거주하고 있었다. 한국에 거주하고 있는 중국인들을 위해 복음을 전하는 화교 선교.

이들을 위한 교회가 세워진 모습을 살펴보면 최근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는 이주민에 대한 선교의 갈피를 잡을 수 있지 않을까? 지난 11일 화교교회100주년 행사가 열린 서울 정동의 한성교회에서 그 해답을 찾아봤다.

# 중국인을 위해 한국으로
처음 한국의 중국인을 위해 헌신을 결심한 사람은 미국 선교사 부인 C.S. 데밍. 중국 선교사 부부의 자녀로 태어난 데밍 여사는 16세에 영국으로 건너가 공부하고 미국에 정착했다가 한국인 도이명 박사를 만나 결혼했다.중국 선교에 나섰던 부모님의 어깨 넘어 중국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픈 마음을 가졌던 데밍 여사는 뜻밖에 한국에서 선교를 시작한다.

한국에 온 첫날 집을 수리하기 위해 사람을 불렀을 때 집으로 온 사람은 다름 아닌 중국인. 이를 본 데밍 여사는 하나님이 자신을 한국으로 부르신 이유를 깨달았다. 대만 중원대학 강인규 박사는 “당시 데밍 여사는 한국에서 많은 화교들을 만났지만 그 중 크리스천은 극소수였던 것을 보고 안타까워했다”며 “다시 한 번 화교들에게 복음을 전해야겠다는 사명을 느끼게 됐다”고 전했다.

한국의 화교들을 위해 기도하던 데밍 여사는 서울에 화교 기독교인이 한 명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크게 기뻐했다.그 사람이 바로 한의사 차도심(처다오신). 그는 혼자서 화교 교회를 세우는 것은 역부족이라고 느꼈지만, 꾸준히 환자를 치료하며 복음을 전했다. 그리고 언젠가 사역을 함께하게 될 누군가를 위해 늘 기도했다. 이 소식을 접한 데밍 여사는 차도심이 바로 자신이 찾던 사람임을 직감했고, 어느 날 오후 그를 초대해 전도 계획을 나눴다. 그리고 두 사람은 의기투합해 화교 교회를 설립하는데 두 팔을 걷어붙였다.

1912년 5월 첫 주일 아침. 역사적인 화교 교회의 첫 예배가 드려졌다. 한국교회청년연합회(YMCA)에 방을 빌려 드렸던 첫 예배의 메시지는 차도심이 전했고, 머지않아 장소를 옮겨 ‘한성교회’를 개척했다. 그리고 초대 목사로 이가풍 목사가 부임했다. 한성교회는 화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물론이요, 사회적 혜택 또한 누릴 수 있도록 헌신했다.

학교와 유아원을 짓는 등 거리에 방치됐던 화교 아이들을 거둬들인 것. 처음 후원으로 시작했던 교회는 상황이 점점 좋아져 부지를 구입해 교회가 세워지는 단계에 이른다. 또한 서울에서 나아가 원산, 인천, 평양에 교회를 개척해 화교들에게 다가가기 위해 더욱 노력했다.

# 위기와 재부흥
날로 부흥해가던 화교 교회. 하지만 역사적 사건들로 교회에 시련이 닥치기 시작했다. 만보산 사건, 태평양 전쟁, 한국 전쟁 등으로 인해 교회는 사라지고 흔적만 남게 되었던 것. 특히 한국 전쟁이 지속되던 1950년부터 3년은 목회자들 또한 뿔뿔이 흩어져 희망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도 떠날 수 없다는 한국인 백영화 목사는 홀로 남아 서울에 남겨진 화교들을 돌봤다. 강 박사는 “전쟁이 끝난 후 화교들의 생활은 점점 안정되어 갔지만 마음은 공허해졌다”며 “이런 계기로 교회는 예배를 회복하기 위해 가정 예배를 시작했고, 나중에는 피어슨 기념학교를 빌려 예배를 드렸다”고 전했다.

또한 “중국인 목회자가 부재한 상황에서 중국어가 능통한 한국인 목사나 외국인 선교사가 말씀을 전하는 상황이 얼마간 지속됐고 머지않아 교인은 안정적으로 증가해 다시 교회 자체 건물의 필요성이 대두됐다”고 말했다. 1954년 화교 교회의 재건을 위해 발족한 중화기독교재건위원회. 같은 해 8월에 소집된 2차 회의에는 중국 대사관의 대사도 참여해 한국 교회의 지지와 원조에 감사를 표하기도 했다. 힘든 환경 속에서도 불구하고 꾸준히 증가한 성도들.

원래의 자리에 교회를 재건하고자 했지만, 도시개발계획으로 불가능했고 미국 북장로회 선교부와 감리회 선교부에서 후원금을 지원받아 1957년 서울 정동 25번지, 지금의 자리에 다시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지역교회들 또한 재건됐다. 인천중화기독교회, 부산중화기독교회, 수원중화기독교회, 대구중화기독교회, 영등포중화기독교회, 군산중화기독교회 등 전국 화교들이 집단 거주하는 곳에는 어김없이 교회가 들어섰다. 모두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하나님의 역사로 교회는 부흥해 자리를 잡아갔다.

# 한국을 넘어 세계로
30여 년의 재건 기간을 통해 탄탄한 기초를 마련한 여한중화기독교. 1980년대가 되자 한국 경제는 비약적으로 발전했고, 사회 분위기도 활기차게 변모했다. 한중수교를 계기로 국가간 교류도 활발해졌다. 더 많은 화교들이 국내로 유입됐고, 화교 교회는 그들을 품기에 여념이 없었다. 1984년 한국선교 100주년이 되던 해 한성교회의 한국 청년들 중 중국 선교에 대한 비전을 가진 청년들이 모여 ‘띠지모임’을 시작했다.

그리고 이 모임은 중국복음선교회의 한국 지부가 됐고 파송, 연구, 훈련의 방면으로 선교 인재를 배양하기 위해 중국선교사훈련원이 개원됐다. 한성교회가 먼저 세계 선교에 대한 비전을 품자 부산, 영등포교회에서도 선교사 양성을 시작했다. 나날이 쇠약하던 화교사회가 선교 사역을 시작한 것. 선교훈련원은 30년이 지난 지금까지 중국, 대만, 싱가포르, 태국 등에 졸업생들을 파송해 복음을 전파하고 있다.

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 우심화 교수는 논찬을 통해 “지난 100년을 회고하며 하나님의 은혜와 수많은 종들의 노력을 기념하고 감사함과 함께 화교 교회의 향후 100년을 향한 방향을 모색하고, 이를 위해 헌신하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한국 내 중국인들은 마치 광야에서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가나안으로 들어가려는 이스라엘 민족의 모습과 흡사하다. 그리고 그들은 일련의 과정들을 통해 하나님이 예비하신 ‘화교 교회’라는 가나안 땅을 밟았다. 도움을 받던 시절에서 벗어나 복음을 전하러 세계로 뻗어나가는 화교 교회를 바라보며 강인규 박사는 이렇게 소망한다.

“앞으로 새롭게 다가올 100년의 역사 가운데 화교 교회와 한국 교회가 손에 손을 잡고 ‘선교 중국’을 향해 나아가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길 소원합니다.”

한편, 이날 열린 세미나를 시작으로 13-14일에는 화교 크리스천들의 한국 내 성지순례, 15일 100주년 기념 감사예배, 16-20일에는 차도심 장로가 처음 신앙생활을 시작한 산동의 중국 교회를 방문해 화교 교회의 뿌리를 찾는 시간을 가지는 등 100주년기념 행사를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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