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 뒤에 찾아온 영광의 빌립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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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 뒤에 찾아온 영광의 빌립보
  • 승인 2002.09.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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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크로폴리스 언덕 사이를 뚫고 주홍빛 여명의 눈동자와 함께 밝아온 헬라의 첫 아침, 그 눈부신 햇살을 온 몸으로 받으면서 우리 일행은 옛 마게도냐를 향해 은빛 날개 동체 속에 몸을 실었다.

이 땅의 역사가 시작되었던 아득하게 먼 옛날, 동편 하늘이 환하게 열리면 호머는 트로이의 리사를리크 언덕에 올라 서사시를 읊었고, 스파르타는 전사들의 요란한 창검술 소리로 새벽의 고요를 깨뜨렸으며 탈레스와 소크라테스, 디오니소스는 철학의 이치를 깨우치기 위해 명상의 세계에 빠져 들어갔다.

고린도 남쪽 미케네에서 시작하여 헬레니즘이라는 화려한 문명의 꽃을 한참 피우고 있었던 사도 바울 당시에도 헬라는 여전히 로마제국의 품위있는 황태자의 명성을 유지하면서 세계문명의 디다스칼로스(스승)의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있었다.

더욱이 코이네 헬라어는 세계의 공용어로 사용되었고 헬라 문화를 빼놓고는 대화 자체가 처음부터 성립되지 않았다. 로마는 막강한 힘을 과시하고 있었지만 실상은 헬라의 옷을 걸쳐 입은 힘센 돌쇠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로마가 정치와 군사의 수도였다면, 헬라는 문화와 학문의 중심지였다.

사도 바울로 하여금 환상을 통해 마게도냐의 한복판에로 밀어 넣으셨던 것은 주님의 강권적인 능력이었다. 거기에는 아시아에만 머물던 유앙겔리온(좋은 소식)을 유럽에도 옮겨 놓고 싶어하셨던 그 분의 간절한 열망이 있었다. 흰 물감으로 굵은 밑선을 그려 놓은 듯이 구불구불한 해안선을 내려다보며 40여분을 날아간 비행기는 데살로니끼 공항에 노련한 콘돌처럼 사뿐히 내려앉았다.

맨 처음 찾아 간 곳은 네압볼리의 현재 지명인 카발라였는데, 네압볼리는 마게도니아의 첫 관문이자 빌립보의 출입문과 같은 항구도시이다(행 16:11). 사도 바울의 일행(바울, 실라, 디모데, 누가)이 사모드라게 섬을 지나 도착했던 첫 번째 항구였다는 것 이외에는 네압볼리에 대한 다른 설명을 성경에서 찾아볼 수 없다. 지금은 마게도냐의 제2 도시(약 15명 거주)로서 그리스 북부 농작물(담배, 벼, 멜론, 포도, 양봉 등)의 주요 집산지와 수출항의 역할을 도맡아 하고 있다.

네압볼리로부터 빌립보까지는 비아 에그나티아(Via Egnatia) 도로로 연결되어 멀리 이스탄불까지 이어지고 있다. 반대편 쪽으로는 네압볼리와 암비볼리, 아볼로니아, 데살로니가를 거쳐 알바니아의 아드리아 해를 건너 이태리 브린디시에 이르고 그곳에서 로마까지는 비아 아피아(Via Appia, 압비아 가도)로 연결되어 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것은 바로 이 길을 지칭하고 있다.

우리 일행은 네압볼리 근교의 완만한 언덕을 오르다가 잠시 차를 길가 옆에 세워 놓은 후 이 역사적인 로마의 옛 도로를 걸어보기로 했다. 촘촘이 돌을 박아 끝없이 이어 놓은 에그나티아 도로는 지금도 사용할 수 있을 만큼 그 보존 상태가 매우 양호하였다.

예수의 십자가 복음이 얼마나 좋았으면 사도 바울의 일행은 이 험하고 외진 길을 마다하지 않고 발이 부르트도록 걸어갔을까? 그들이 피땀 흘려 전해준 복음 때문에 지금은 편하게 구경 삼아 걷고 있는 내 자신이 왠지 부끄럽고 초라하게만 느껴졌다.

10여 분을 더 달려 도착한 곳은 빌립보 시내 변두리에 있는 ‘문밖 강가’(행16:13)였는데, 현재는 지각크티스(Zygaktis)강으로 불리워지고 있었다. 2m정도의 폭 넓이에 실개천처럼 흐르는 강가에는 세례를 줄 수 있도록 둘러 놓은 축대 앞에서 독일어를 쓰는 성지 순례팀이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개울가로 내려가 손과 발을 담그니 그 동안 쌓였던 피로가 한꺼번에 싹 가시는 듯 뼛 속까지 시원함을 느꼈다. 강뚝에 앉아 마음속으로 시간의 흐름을 2천 년 전으로 되돌려 놓고 나만의 상상의 나래를 펴보았다. 두아디라성의 자주 장사 루디아! 그것이 그녀에 관해 사도행전 기자가 우리들에게 알려주고 있는 지식의 전부이다.

어떤 의미에서 빌립보에서의 사도 바울과 루디아의 만남은 차라리 극적인 것이었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것이다. 가말리엘 최고의 지성인과 자주 옷감을 팔던 비천한 장사꾼, 선민 유대인 남자와 헬라 이방인 여자, 겹겹히 둘러싼 엄격한 전통 사회에서 두 사람의 만남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어색한 상봉이었다.

어쩌면 루디아는 바울 일행에게 자주 옷감을 팔고 약간의 돈을 벌려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바로 그날 빌립보에서 금보다 더 귀하고 자색 옷보다 더 값진 최고의 보석 진주,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게 되었다. 옛 교회 전승들은 후에 루디아가 빌립보 교회의 초창기 집사로서 온갖 희생의 눈물과 헌신의 땀을 아낌없이 쏟아 바쳤던 것으로 전해주고 있다.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손짓하는 환상을 보고 찾아갔던 빌립보, 거기에서 루디아와 몇몇 식구들을 구원하는 수확을 얻기는 했지만 오히려 그를 기다리는 것은 혹독한 매질과 싸늘한 감옥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언제나 바울의 손을 굳게 붙잡아 주시는 모습을 직접 보여주시려는 듯 친히 땅과 바위를 흔들어 옥문을 열고 착고를 풀어주셨다.

아니 그보다 더 피눈물도 없는 잔인한 간수의 마음을 깨뜨려 그 온 가족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식구가 되게 하는 회심의 기적을 이루게 하셨다.
바울이 갇혔었다는 빌립보의 감옥은 그날 밤의 엄청난 사건을 생생하게 증언이라도 하듯 허물어지고 열린 채로 우리들을 조용히 맞이하고 있었다. 언젠가 천국에 가면 바울과 루디아 그리고 간수 집 사람들에게 빌립보 교회의 이모저모에 대해 더 자세히 물어보리라 다짐하면서 못내 아쉬운 발걸음을 천천히 떼어놓기 시작하였다.

고영민목사(천안대 부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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