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 통일운동 “막히면 돌아가도 멈추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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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 통일운동 “막히면 돌아가도 멈추지는 않았다”
  • 최창민 기자
  • 승인 2012.07.19 1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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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기독자협의회부터 평화열차까지 ‘30년 통일운동’ 여정

▲ 2013년 WCC 부산총회에서 한반도 평화 이슈를 전 세계에 알리기 위해 기획된 '평화열차'의 북한 통과 여부가 관심을 모으고 있다. 한국 교회는 지난 30여 년 동안 우리 사회의 통일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어 왔다.
1 9 8 0년 광주 항쟁 계기로 민간 통일 운동 촉발돼
도잔소 회의 통해 세계 교회 선교 과제로 자리매김

1945년 미국과 소련에 의해 남북으로 분단된 이후 한국 교회는 민족의 화해와 평화통일을 ‘하나님의 명령’이자 ‘선교적 사명’으로 받아들였다. 특히 한국 교회는 통일에 대한 논의조차 자유롭지 못했던 1980년대 통일에 대한 열망을 실천하기 위한 운동에 돌입했다. 1981년 6월 서울에서 제4차 한독교회협의회가 개최됐다. 이 회의에서 한국과 독일 교회는 통일이 교회의 과제임을 확인했으며, 통일문제를 다룰 교회 공기구의 신설이 논의됐다. 독일에서는 해외기독자협의회가 결성돼 남북 기독자간 대화가 진행됐다. 본지는 1981년 해외기독자협의회를 시작으로 지금까지 약 30여 년 동안 진행된 한국 교회의 통일운동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1980년 광주5.18 민주항쟁은 한국 사회의 통일 논의에 있어서 중요한 분기점이 됐다. 광주항쟁 이후 시민사회는 선민주-후통일, 선통일-후민주 논쟁이 벌어졌다.

 # 광주항쟁, 통일운동 방아쇠 당겨
1960~70년대 군사독재시기를 보낸 한국 사회는 먼저 민주화를 이뤄야한다는 열망이 강했다. 하지만 시민사회는 광주시민들을 ‘빨갱이들의 폭동’으로 몰아 총을 쏘았던 군사정부의 실체를 경험했다. 이후 ‘민족의 분단체제를 극복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었다. 통일과 민주화 모두 포기 할 수 없는 과제라는 것을 자각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한국 교회의 통일운동이 시작된 것도 이때다. 광주사태 이후 국내외 교회들이 잇따라 통일을 위한 노력을 감행했다. 군부독재 당시 엄혹한 국내 정세 속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통일운동이 가능한 곳은 해외뿐이었다. 1981년 독일 교회를 중심으로 ‘조국 통일을 위한 북과 해외동포 기독자 간의 대화’ 제1차 회의가 진행됐다. 이른바 ‘해외기독자통일협의회’가 결성된 것이다.

이듬해 12월 헬싱키와 1984년 12월 오스트리아 빈에서 2차, 3차 회의가 각각 열렸다. 이들은 한국의 민주화에 대해 집중적으로 논의했다. 특히 ‘동포들에게 보내는 호소문’을 통해 자주적 통일, 평화적 통일, 민족 대단결 등 촉구하며 중립적 연방국가안, 군사독재정권의 종식 등을 주장했다. 국내에서도 통일 논의를 위한 노력이 힘겹게 이어졌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이하 교회협)는 1982년 2월 31차 총회에서 ‘통일문제연구원 운영위원회’를 특별위원회로 신설할 것을 결의했다. 하지만 정부당국은 ‘민간 차원의 통일논의를 허가할 수 없다’며 봉쇄했다. 이듬해 3월과 5월 교회협은 통일문제협의회를 개최할 예정이었으나 정부의 방해로 무산됐다.

협의회 개최 방해와 관련 교회협은 그해 6월 성명서를 통해 “정부는 개회에 임박하여 아주 집요하고 또 노골적인 방법으로 협의회 개회를 방해하여 동 협의회가 유회되는 사태를 빚었다”며 “우리는 한국 교회가 통일에 대한 민족의 염원과 갈망에 호응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명령이라고 믿는다”고 밝혔다.

# 통일운동의 기폭제 ‘도잔소 회의’
한반도 평화통일 운동은 해외 교회의 참여로 본격화됐다. 세계교회협의회(WCC) 국제문제위원회(CCIA)는 1984년 10월 일본 도잔소에서 ‘동북아시아의 평화와 정의협의회’를 개최했다. 참석자들은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위해 세계 교회가 함께 노력할 것을 제안했다.

동북아 지역과 전 세계의 긴장완화를 위해서는 한반도의 평화가 결정적으로 중요하다는 것을 공통적으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참석자들은 도잔소 선언을 통해 분단 상황은 결코 정의도 평화도 될 수 없으며, 분단을 극복하고 신뢰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남북 교회간의 만남과 대화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이른바 ‘도잔소 회의’ 이후 1980년대 후반 한국 교회와 세계 교회는 지속적으로 유대관계를 맺고 구체적인 통일운동을 실천해갔다.

북한은 도잔소 회의 결과를 환영했다. 도잔소 회의 이후 북한 교회는 세계 교회와의 교류 확대를 통해 새로운 논의의 장을 열었다. 1985년 11월 WCC 대표단이 북한을 처음 방문했다. 이듬해 4월 미국교회협의회 대표단 10명도 북한과 남한을 잇달아 방문했다. 1986년 9월 CCIA는 스위스 글리온에서 평화와 관련한 세미나를 개최했다. 이 자리에는 조선기독교도연맹 대표단 5명, 교회협 대표단 6명이 초청됐다. 민족 분단 이후 처음으로 남북한 기독교인이 만남을 가진 것이었다. 이들은 감격 속에서 성만찬을 나눴고, 한국 사회에 깊은 인상을 줬다.

같은 해 11월 미국교회협의회는 한반도 분단에 개입한 데 대한 죄책고백을 했다. 또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정책성명으로 채택하고 통일을 위한 치유 노력을 펼치기로 결의했다. 후속 논의로 1989년 4월 남과 북의 교회가 모여 평화통일협의회를 개최했다. 여기에서 남북 교회는 ‘한반도평화통일을 위한 화해의 캠페인 선언서’를 발표했다. 같은 해 12월 미국장로교회 제198차 총회는 ‘한반도의 화해와 통일에 관한 결의문’을 채택했다.

# ‘88선언’ 통일 청사진 제시
1988년 2월 교회협 제37차 총회는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 선언’(88선언)을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88선언은 통일문제협의회를 통해 3년여에 걸쳐 연인원 350여 명의 회원교단 대표자들이 모여 마련한 문서이며 한반도의 평화통일을 위해 처음으로 신학적 정책적 입장을 밝혔다. 88선언은 민족분단이야말로 냉전체제의 구조적인 죄악의 결과이고 남북사회의 구조악을 만들어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또 분단의 죄를 회개하고 신앙고백을 바탕으로 다섯 가지 원칙과 다섯 가지 구체적 과제를 제시했다. 이 선언은 민간에 의해 이뤄진 최초의 통일선언이었으며 민간통일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평화열차 프로젝트 소위원장 나핵집 목사(열림교회)는 “세계 교회가 지지했지만 정작 국내에서 전폭적인 환영을 받지는 못했다”며 한계를 지적하고 “국내 시민사회 단체들이 통일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설 수 있는 기폭제가 됐다”고 평가했다.

88선언 이후 민간의 통일운동이 두드러지게 확산됐다. 4개월 뒤인 1988년 7월 7일 당시 노태우 대통령은 ‘민족자존과 통일번영을 위한 특별선언’이라는 제목으로 ‘7·7선언’을 발표했다. 북한과 대결 관계를 청산하고 자주·평화·민주·복지의 원칙에 입각하여 민족자존과 통일번영의 새 시대를 열어나갈 것을 천명한 것이다. 88올림픽을 성공시키기 위한 정치적 행동이었다는 비판도 있지만, 냉전으로 대립했던 국가들의 참여를 이끌어내면서 대회를 성공적으로 치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989년 3월 문익환 목사가 정부의 허가 없이 방북을 감행했다. 이들은 김일성 주석과 두 차례 회담을 갖고 통일 문제 등을 논의한 결과, ‘자주적 평화통일과 관련된 원칙적 문제 9개항’을 발표했다. ‘연방제 방식의 통일’이라는 구체적인 통일 방안을 명시해 관심을 모았다. 이 합의는 11년 뒤인 2000년 김대중 대통령이 추진한 ‘6.15공동선언’의 토대가 됐다.1991년 12월 남북기본합의서 채택을 추진한 임동원 전 통일부 장관은 당시 88선언의 영향을 받았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 계속되는 운동, 한반도 에큐포럼
이후에도 한국 교회의 평화통일을 위한 노력은 계속됐다. 1988년 11월 제2차 글리온 회의에서 남북한 교회는 분단 50년을 맞는 1995년을 ‘평화와 통일의 희년’으로 선포했다. 희년을 이루기 위한 교회의 노력은 1993년 남북인간띠잇기대회로 이어졌다. 그해 8월 15일 임진각에서 독립문까지 48Km 구간에 6만여 명의 시민과 교인이 참여했다. 2년 후 1995년 8월 15일 발표된 희년선언에는 남북한 신뢰와 평화구축을 위한 5대 원칙, 바람직한 통일을 위한 3대 원칙, 희년정신 실천을 위한 교회의 5대 과제 등이 제시됐다.

하지만 1990년대 초반 북한과 미국의 핵공방이 지루하게 이어지면서 희년선언은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996년 마카오 회의에서 북한 조선기독교도연맹 위원장 강영섭 목사는 한국과 세계 교회에 북한의 식량난을 호소하며 지원을 요청했다. 이후 한국 교회와 사회는 북한동포돕기운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했다.

그해 11월 총회에서 교회협은 6.25를 ‘민족화해의 날’로 선포했다. 1999년 도라산에서 시작된 평화통일 남북기도회는 현 정부 출범 이후 남북 관계가 경색되기 전까지 계속됐다. 2005년 한국기독교장로회 평화운동본부 기념대회에서 한국 교회는 한반도 평화 의제를 다룰 공식 국제기구 결성을 제안했다.

이후 2006년 12월 홍콩에서 모인 세계 교회 지도자들은 ‘한반도 에큐메니칼 포럼’ 창립을 결의했다.교회협 화해통일국장 채해원 목사는 “도잔소 회의 이후부터 세계 교회가 남북 평화 문제를 중요한 의제로 다뤄왔지만, WCC가 한반도 문제에 집중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면서 “대북인도적 지원을 넘어 북한 사회개발 협력을 위한 포럼이 필요하다는 데 세계 교회가 공감했다”고 말했다. 한반도 에큐메니칼 포럼은 사회개발 프로그램을 통해 북한을 지원할 계획이다.

독일 교회는 풍력에너지, 케나다와 일본 교회는 태양에너지를 각각 지원할 예정이다.한반도 에큐메니칼 포럼은 남북관계가 경색된 상황에서도 대북지원을 가능하게 했다. 지난해 5월 18일 교회협은 정부 승인 없이 중국 애덕기금회를 통해 밀가루 172t을 북측에 전달했다. 채 목사는 “한반도 에큐메니칼 포럼이 결성된 이후 교회협의 통일 논의를 세계 교회에 알릴 수 있게 됐다.

대북지원을 추진할 때 국내 교회와 해외 교회들의 참여도 높아졌다”며 “WCC가 놓아버린 한반도 이슈를 세계 교회에 알리고 관심을 집중시키는 결과를 가져온 것”이라고 평가했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한국 교회는 1981년 이후 정부의 탄압과 간섭을 견디며 통일운동의 대중화를 선언하고 실천해 왔다.

또 WCC를 비롯한 세계 교회와 연대해 한반도 통일문제에 대한 세계 교회의 관심과 지지를 이끌어 왔다.2013년 WCC 부산총회를 앞두고 한국 교회는 ‘평화열차 프로젝트’를 준비하고 있다. 독일 베를린에서 시작해 러시아, 중국을 거쳐 평양과 부산을 열차로 통과하는 평화열차는 한반도 분단의 벽을 허무는 평화행진이다.

나핵집 목사는 “평화열차를 통해 한반도 평화 이슈가 다시 한 번 전 세계적인 주목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통일부 장관을 지낸 성공회 이재정 신부는 “국토에서 철로가 다니는 것은 피가 통하는 것과 같다”며 “평화열차가 성사될 수만 있다면 한반도의 막힌 동맥이 뚫리는 큰 의미를 갖는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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