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 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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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 우상
  • 정민주 기자
  • 승인 2012.07.04 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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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신학 이야기 (32)

교회의 지체는 절대로 똑같아질 수 없다. 모든 지체가 같아질 수 없다는 사실을 안다면 같아지려는 생각은 있을 수 없다. 로마서 12장 4절부터 보면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기능을 가진 것이 아니니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라고 기록돼 있다.

마태복음 10장 33절에서도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고 했다.

한국 사람들이 사는 방법은 큰소리 그리고 자신만만함이다.  그 자체가 장삿꾼들의 삶이다. 요즈음 이미 지난 풍속이지만 ‘마케팅전략’이 능숙하면 성공할 수 있다고 가르치고 그대로 따라하고 있다.

매출로 인한 이익이며 시장점유율이다. 세상 사람들이 사는 방법은 돈이다. 유통자금이 많으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 세상에서 살아남는 것이 크고 많은 것이 진리다. 그래서 안간힘을 다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기업은 이득을 남기기 위해서 온갖 방법을 동원한다. 자기 자신도 모르게 거짓도 그리고 위선을 할 수 있다. 양심의 가책에서도 감정자체가 무디어져서 시간이 갈수록 우상의 도시에서 자기 자신도 알 수 없는 수많은 신들과 우상을 만들게 된다.

그것이 현대 교회에서 사용하는 교회성장이라는 프로젝트일 수 있다. 그래서 기업은 각종 마케팅기법을 동원하여 시장조사를 하고 판촉을 하고 이벤트를 하며 매출을 늘리고 시장점유율을 높이기 위해서 안간힘을 다 쓰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크고 작은 것을 구별하지 않는다. 옳고 그른 것도 아무런 관계가 없다. 요나의 경우 10만이 넘는 한 도시 전체가 구원을 받을 수 있었다.

베드로의 경우는 한번 설교에 수천 명이 회개할 수 있었다. 그런가하면 바울은 수일동안 애쓰고 힘썼으나 단 몇 명만이 복음을 받아드렸다고 한다. 

그러나 이들 모두의 격차와 선교에 관한 평가가 필요하지 않았다. 이들이 요나와 같이 베드로와 같은 비전을 둔다든지 희망사항이 아니었다. 각자가 다른 사람을 모방하려고 하지 않았고 장기적인 목회계획도 없었기에 이들 모두는 자유했다.

어느 책에서 한국 교회는 고칠 수 없는 고질병을 세 가지로 평했는데 곧 ‘삼허현상’이라고 기록했다. 그 상세한 내용을 기록했는데 무릎을 칠 정도로 그 말에 동감했으며 그보다 중병의 진단은 매우 단순한 일이었으면서도 치유하기 힘든 뱀이 제공한 ‘뻥’의 속성이었다.

선악과를 먹으면 분명히 죽기 때문에 성경은 ‘정녕’죽으리라고 했는데 ‘죽지 않는다’라고 하여 ‘먹으면 너는 밝아지고, 같아지고, 알게 된다’라는 오늘의 삼대뻥을 주신 것이다.

첫째 허수(虛數)는 교인수 등 중요한 통계치는 두 배, 세 배로 과장하는 병이다. 둘째 허세(虛勢)는 물량주의에 자기과시욕으로 정직성을 상실한다. 셋째 허상(虛像)은 큰 것에 대한 갈망하여 고무풍선에 바람을 계속 집어넣는 일을 서슴지 않고 행한다.

결국 터져버려 추한 흔적을 남기는 것을 알면서 반복한다. 중요한 것은 첫째로 숫자에 매이기에 허세와 허상이 만들어지고 있다. 거짓말을 믿음이라는 단어로 포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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