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왕기서(106강) 이집트왕 느고 2세와 므깃도에서의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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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서(106강) 이집트왕 느고 2세와 므깃도에서의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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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2.06.05 1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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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시아의 죽음

어떤 학자들은 요시야 왕이 므깃도에서 바로를 마땅치
않은 태도로 영접을 했고, 바로가 그를 죽였다고 주장한다.

열왕기하 23장 24절에서는 신접한 자와 점쟁이와 드라빔과 우상과 모든 가증한 것을 제거하였다. 이것 역시 레위기 20:23의 이방의 풍습을 좇지 말라는 율법의 가르침뿐만 아니라 레위기 19:26~28과 신명기 18:10~11의 점쟁이를 용납하지 말라는 가르침을 어긴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유다 백성들이 가나안에 정착하여 살면서 얼마나 많은 가나안의 풍습에 영향을 받았는가를 보여준다.

이러한 요시야의 개혁에 대하여 ‘요시야와 같이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모세의 모든 율법을 따라 여호와께로 돌이킨 왕은 요시야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그와 같은 자가 없었더라’고 평가한다. 그러나 이러한 요시야의 개혁에도 불구하고 여호와의 유다에 대한 진노를 돌이키지 아니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그 원인은 므낫세 때문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 결과 27절에서 여호와는 예루살렘과 성전을 버릴 것을 말씀하였다.

열왕기하 23:28~30절에서는 요시야의 죽음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으며, 역대하 35:20~36:1에도 기록되어 있다. 28절에서는 다른 유다 왕처럼 그의 남은 행적은 유다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어 있다고 말한다.
29절에서는 요시야의 죽음의 사건에 대하여 간략하게 기록하고 있다. 요시야의 죽음에 대하여 열왕기서는 바로 느고를 맞아 므깃도에 나갔다가 전사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 시기에는 아시리아의 영향력이 팔레스틴에 전혀 없었으며, 오히려 이집트가 아시리아 제국이 정복했던 서쪽 지역을 거의 그대로 물려받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새 군주가 그의 속주를 지나갈 때 그 속주의 통치자가 그에게 나와 배웅하는 것이 예의였다. 어떤 학자들은 요시야 왕이 이때 므깃도에 나아가 바로를 별로 마땅치 않은 태도로 영접을 했고, 그의 충성심을 의심한 바로가 요시야를 죽였다고 주장한다. 혹은 이러한 둘 사이의 만남에 어떤 반역세력의 흉계가 있었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그러나 자세한 이유는 알 수 없으며, 므깃도에서 요시야와 느고의 만남은 역사적으로 믿을 만한 사실이라고 볼 수 있다.

요시야가 바로 느고 2세와 므깃도에서 싸운 사건은 주전 609년에 발생한 사건이다. 이집트의 느고 2세는 이집트 왕이 된 후 주전 609년에 아시리아 왕을 도와 싸우기 위해 북진하였다.<바벨론 연대기>에는 요시야가 전사한 주전 609년의 역사적 배경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제17년(609년)> 타무즈(Tammuz) 달에 아시리아의 왕 아수르-우발리트(Ashur- uballit)(2세)가 많은 이집트의 […]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 하란(Harran)을 점령하기 위하여 하란으로 향하여 전진하였다. 그들(이집트 군대)이 (이곳을) 점령하였다. 그들은(이집트 군대) 아카드 왕이 거주하였던 요새를 파괴하였다. 그들이(이집트 군대) 이곳을 점령하였을 때 그들이(이집트 군대) 하란을 향해 진 쳤다. 엘룰(Elul) 달까지 이 도시를 향해 전쟁을 하였으나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철수하지 않았다.

아카드 왕은 그의 군대를 돕기 위하여 갔고… […] 그는 이잘라(Izalla)로 올라갔고 산에 있는 많은 도시들이 […] 그는 여기에 불을 놓았다 […] 이 때 […]의 군대가 우라르투(Urartu) 지역까지 행군하였다. […]땅에서 이집트 군대는 그들의 […]을 약탈하였다. 왕이 거주하였던 요새는 없어졌다. 이집트 군대는 […]에 올라갔다. 아카드의 왕은 고향으로 돌아왔다(ABC 3 66~75).’

그런데 알 수 없는 이유로 요시야가 느고 2세와 므깃도에서 전쟁하다 전사한다. 요시야의 므깃도 전사에 관하여 풀기 어려운 질문은 왜 요시야가 므깃도가 갔는가 하는 점이다. 이에 대하여 느고 2세가 주전 609년 여름에 정권을 잡은 새로운 왕조이기 때문에 이들의 군사력을 시험하기 위해 갔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 사건과 관련된 열왕기하 23:29절의 아시리아 “왕을 치고자 하여”라는 번역은 히브리어를 잘 못 번역한 것이다. 본문의 히브리어에 등장하는 전치사는 “…에게 반역하여”(against)라는 의미보다는 “…에게”(to)의 의미로 사용된다. 따라서 “앗수르 왕에게 나가므로”로 번역하는 것이 바른 번역이다. 역대기하 35:20에서는 이 사건이 갈그미스에서 있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30절에서는 “요시야의 신복들이 그의 시체를 병거에 싣고 므깃도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그의 무덤에 장사하니 백성들이 요시야의 아들 여호아하스를 데려다가 그에게 기름을 붓고 그의 아버지를 대신하여 왕으로 삼았더라”라고 기록돼 있다.

요시야의 죽음에 대한 역대기 사가의 해석은 신명기 역사가의 해석과 큰 차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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