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백성이 갈망하던 한글성경, 복음의 씨앗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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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백성이 갈망하던 한글성경, 복음의 씨앗이었다”
  • 김동근 기자
  • 승인 2012.05.10 10: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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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성경 출간 130주년 ‘한 권의 성경이 우리에게 오기까지’

초기 한국 선교 기틀 닦은 존 로스 선교사
씨 뿌리러 파송된 선교사들이 열매 거둬


▲ 한글 최초성경을 출간한 존 로스 선교사
▲ 1887년 출간된 최초의 한글성경 '예수셩교 누가복음젼셔'

 

 

 

 

 

 

 

 

 


 

요즘 성경은 우리 주변에서 흔히 구할 수 있는 책이 되어버렸다. 심지어 예배시간에 성경책 대신 휴대폰을 꺼내 ‘성경 애플리케이션’을 실행하는 성도들도 어렵잖게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가까이 있는 성경을 기독교인들은 자주 꺼내보고 있을까? 만약 그렇지 않다면 성경의 소중함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있을까?

최초 한글 성경이 출간된 지 130년이 지났다. 성경이 우리 손에 오기까지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 알아본다.

# 존 로스 한국을 품다
스코틀랜드 연합장로교회 해외선교부의 중국선교사 존 로스는 1972년 8월 23일 중국의 상해에 도착했다. 선교본부는 그를 만주의 관문 영구 항으로 파송했다. 로스는 그곳에서 중국어와 사서삼경을 7개월 만에 마치고, 곧 순회전도까지 나갈 정도가 됐다.

당시 조선은 유교나 불교, 샤머니즘에 대한 신앙심이 점차 식어 종교적으로 심한 허탈감을 맛보고 있었다. 한편 중국과 인접한 관서지방에는 일찍이 청과의 무역을 통해 성장한 상인이 의주를 중심으로 부를 축척해 제3의 계급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이들 대부분은 한문과 만주어에 능통한 독서층이었고, 경제력과 지력을 가진 이들은 다른 지방의 어떤 계층들보다 개방, 독립적이어서 새로운 문화와 사회질서에 대한 욕구가 강했다. 그들 중 이응찬, 서상륜이 있었다.

1873년 로스는 윌리엄슨 목사로부터 6년 전 토마스 목사의 평양 대동강 순교 소식을 듣게 된다. 이때 선배 선교사들의 열의에 감동한 로스 선교사는 한국을 품게 됐다. 그리고 아시아의 마지막 땅 조선에 복음의 문을 열겠다는 결심을 한다.

# 두 번의 고려문 여행
1874년 로스는 첫 번째 고려문 여행을 통해 조선 상인들을 만나고 그들에게 설교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조선 상인들은 그가 전하는 말씀보다 그가 입은 옷감에 더 관심을 보였다. 그런데 며칠 후 50대 남자상인 한 명이 여관에 찾아와 오랜 대화 끝에 한문성경과 훈아진언(전도문서)을 받아갔다. 상인은 집으로 돌아가 자신의 아들과 친구들이 돌려볼 수 있게 했는데 그 아들이 바로 한국 개신교 최초의 수세자 백홍준이다.

1876년 여동생 캐서린과 선배 선교사 매킨타이어가 결혼하자 로스는 자신의 사역지를 그들에게 맡기고 내륙을 담당코자 심양으로 갔다. 그해 4월 말 강화도조약에 의한 한국의 문호개방 소식을 듣게 된 로스는 두 번째 고려문 여행을 하게 됐다. 첫 번째 여행과는 달리 두 번째 여행은 한국어 공부와 신약성경 번역의 조력자를 찾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몇 번의 시행착오 끝에 만난 사람이 바로 이응찬이었다.

로스는 이응찬과 함께 한글 공부를 시작했고, 그를 통해 뒷날 요한복음과 마가복음을 번역했다. 두 사람은 1877년 코리안 프라이머(Corean Primer)라는 외국인 선교사들을 위한 한국어 교재를 발간했다. 이응찬은 동향의 친구들 몇 명과 함께 번역을 시작해 1878년 봄까지 ‘한문문리성경’을 대본으로 요한복음과 마가복음을 번역했다.

그 뒤 이응찬이 귀국하고 로스는 서상륜을 만난다. 서상륜은 홍삼장사를 하다 열병에 걸려 죽을 지경에 이르렀을 때 영국선교사 병원에서 치료받던 중 매킨타이어의 전도를 받고 완쾌 후 로스를 만났다. 로스는 이응찬에 이어 서상륜을 한국어 선생 겸 번역인으로 채용했고, 서상륜은 이어진 누가복음의 번역을 맡게 됐다. 1878년 말까지 진행된 누가복음의 번역 후 이듬해에는 로스가 안식년을 맞아 귀국함에 따라 매킨타이어의 주도하에 백홍준 외 1명이 마태복음, 사도행전, 로마서 일부를 번역했다.

# 한글 성경의 출간
1881년 6월 안식년을 마치고 돌아온 로스는 한글성경 출간에 박차를 가한다. 로스는 성경 번역에 있어서도 원칙을 두었는데, 첫째, 본문의 뜻과 일치하면서 한국어 어법에 맞는 절대 직역을 하며 둘째, 영어본보다는 ‘개정그리스어성경’을 기준으로 한다는 것이었다.

번역 방법도 개편했다. 관리출신의 학자가 한문성경에서 1차 번역을 하면 로스와 이응찬이 그리스어 성경을 참고해 2차 번역을 하고 이것을 1차 번역인이 정서해주면 다시 로스와 이응찬이 재수정하고 로스가 그리스어 성경과 성구사전 및 메이어 주석 등을 참고 대조하면서 어휘를 통일한 후 식자공의 손에 넘기는 순서를 취했다.

출판사업도 같은 해 6월에 시작돼 스코틀랜드 성서공회의 지원으로 일본 요코하마에서 주조된 35,563개의 음절별 한글 연활자가 7월에 도착, 인쇄기는 상해에서 구입했다. 또 2명의 중국인 인쇄공과 김청송이 식자공으로 채용되면서 ‘심양문광서원’이라는 이름으로 1881년 9월부터 인쇄에 들어갈 수 있게 됐다. 성경을 인쇄하기 전 시험인쇄로 ‘예수셩교문답’과 ‘예수셩교요령’이 간행됐는데 이는 한글로 인쇄된 최초의 기독교 문서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1882년 2월 24일 ‘광세 팔년 예수셩교 누가복음젼셔 심양문광셔원 간’이라는 표지가 붙은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성경 누가복음이 출간됐다. 이어 5월 12일에는 요한복음이 출간됐고, 1887년 ‘예수셩교젼셔’ 라는 이름의 신약성경이 완성됐다.출간된 성경을 반포하는 일에도 많은 이들의 고초가 있었다. 특별히 권서들은 어려움을 감당하고 조선의 백성에게 성경을 전했다. 이들에 대해 전 국사편찬위원장 이만열 교수는 “성경을 짊어지고 복음의 씨를 뿌린 전도의 선구자”라고 표현했다.

또 일각에서는 낱장의 성경을 새끼줄로 꼬아 가지고 들어왔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그만큼 조선의 복음에 대한 갈망이 컸던 것이다. 그리고 1885년 4월 5일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국내에 입국하기 전, 이미 조선에는 많은 복음의 씨앗들이 뿌려져 있었고 그들은 씨를 뿌리러 와서 열매를 거두는 역사를 체험했다.

# 우리가 받은 복음을 전 세계로
선교사가 파송되기 전 먼저 성경을 받아보는 것은 특별한 경우다. 이와 관련 양화진문화원(원장:박흥식)은 ‘하나님이 조선을 이처럼 사랑하사’라는 영상을 제작해 조선에 전해진 필연적인 복음에 대해 알리고 있다.

또 대한성서공회(사장:권의현)는 세계성서공회연합회를 통해 여러 가지 면에서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성서공회는 성서 보급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미자립 성서공회들이 요청하는 성경을 직접 인쇄 제본하고 그 비용 또한 모두 지원하는 ‘미자립성서공회 성서 기증사업’을 시행하고 있다. 그리고 현재 89개의 국가에 131개의 언어로 번역돼 총 2,927,525부의 성경이 수출됐다.

성경번역선교회(대표:박민하)도 우리에게 복음이 전해졌던 축복을 다른 이들에게 전해주고 있다. 이들은 “성경번역은 혼자서 할 수 없는 사역”이라며 “팀 사역과 동시에 말씀을 능률적으로 전할 수 있는 전문가들이 필요하다”고 전했다. 또한 “기록된 말씀이 없이는 복음의 진리가 뿌리를 내리고 싹을 내어 결실할 수 없다”면서 “성경번역은 교회 설립과 성장에 필수적인 요소”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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