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68강) 세월과 신앙의 성장은 반드시 정비례하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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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68강) 세월과 신앙의 성장은 반드시 정비례하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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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2.03.21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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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베대의 아들들의 허황한 간청(2)

믿음의 길에 들어선 이후 일지라도, 구원 완성을 위한
노력을 게을리할 때, 우리의 신앙이 퇴보할 수도 있다.

세배대의 아들 야고보과 요한의 허황한 간청을 보면서, 이제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의문을 갖게 된다: “여태껏 3년여에 걸쳐 주님으로부터 그토록 가르침 받았건만, 어찌하여 제자들은 여전히 이처럼 세속적이고, 이기적이며, 하나님의 뜻에 이렇게 어두울 수가 있을까?” 이 질문에 답하면서, 오늘날 21세기 제자들인 우리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교훈을 생각해 보자.

첫째, 세월과 신앙의 성장은 반드시 정비례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반비례할 수 있다. 제자들은 약 삼년 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로부터 온갖 값진 교육을 받았다. 삼년이란 세월은 결코 짧은 기간이 아니다. 물론 삼년의 세월 동안 제자들이 아무 것도 배운 바가 없는 것은 결코 아니다. 마가복음 8장 29절에서의 베드로의 고백, “주는(당신은) 그리스도시니이다”는 분명 예수님께 인류의 구원이 달려있음을 믿는 훌륭한 신앙의 표현이다.

그러나 거기서 베드로는 인류의 구원이 예수님의 고난을 통해 이뤄진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였다. 이 때문에, 앞서 언급한 대로, 세 번에 걸친 주님의 특별 교육이 베풀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여전히 영적 어두움 가운데 처해 있었다. 삼년 여의 세월이 흘렀건마는 여전히 제자들은 처음과 크게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 못하였던 것이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세월이 흐르면 자연적으로 믿음과 신앙도 함께 발전하고 성장할 줄로 생각하기가 쉽다.

그러나 성경은, 특히 오늘 본문 말씀은, 이런 생각이 항상 옳지 않음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세월이 아무리 많이 흐르고 지난다 할지라도, 그 믿는 바 신앙이 정비례하여 발전하기보다는 오히려 더 악화되는 반비례 현상이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음을 우리는 목도한다. 오히려 알면 알수록 우리의 신앙은 그만큼 습관적이고 지식적으로 그치기 쉬울 수도 있다.

다음의 사례들은 성경에서 만날 수 있는, 세월의 흐름에 반비례하여 그 신앙이 퇴보한 인물들의 예이다.

첫 번째로 솔로몬은 왕으로서의 통치를 시작하기 전에 일천 번제를 드림으로써 아름다운 출발을 가졌으나, 만년(晩年)에는 숱한 이방 여인들과 결혼하여 이스라엘 내에 이방인들의 종교가 들어오게 만듦으로써 이스라엘 백성의 순수한 신앙을 망쳐놓고 만다. 결국 솔로몬은 백성을 타락케 만든 장본인으로서 남을 실족(失足)케 만든 사람이 되고 말았다. 주님의 말씀에 따른다면(막 9:42), 솔로몬은 그야말로 연자맷돌을 목에 달고 바다에 던져질 사람이었다.

두 번째로, 이스라엘 나라의 초대임금이었던 사울 왕은 애초에는 왕으로 지목될 때 행구(行具) 사이에 숨을 정도로 겸손하였으나, 왕위에 오른 후 갈수록 교만하고 난폭하여져서 사무엘 선지자 대신 제사를 드리는 등 월권행위를 하였으며, 또한 아말렉 족속과의 전투에서는 여호와의 말씀에 순종치 아니한 채 제멋대로 전리품을 착복하는 죄악을 저질렀다. 또한 아들의 절친한 친구요 이스라엘을 블레셋의 손에서 건져낸 민족의 영웅 다윗을 죽이려 애를 썼던 죄악도 범하였다. 이처럼 여러 종류의 죄악 속에 살다가 마침내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 자살로 인생을 마감지음으로써 불신앙의 극치를 드러냈다.

세 번째로, 이전의 설교에서 언급한 내용이지만, 마가복음 9장의 아홉 제자들은 마가복음 6장에서는 두 명씩 나가서도 병자를 고치고 귀신을 내어 쫓는 능력과 권세를 발휘했지만, 9장에서는 아홉 명이 달려들어서도 간질병 들린 한 명의 소년을 고치는데 실패하고 말았다.

위의 사람들은 세월의 흐름에 정비례하여 그 신앙이 성장하기 보다는 오히려 반비례하여 그 신앙이 퇴보한 사람들이다. 세월이 흐르면 신앙이 자연스럽게 성장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세월과 신앙이 정비례하기 위해서는 선한 노력이 절대로 필요하다. 그러므로 일단 예수님을 구주로 믿은 다음에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인답게 사는 노력이 절실히 필요한 것이다.

이런 진리를 바울은 이렇게 표현하였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 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 참고 엡 4:1). 여기서 “이루라”(katergajesthe)는 현재 명령법이니, 어떤 동작의 계속적인 상태를 강조하는 것이다. 즉 구원을 위해 계속적으로 끊임없이 노력하라는 뜻이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우리의 구원은 이미 결정(決定)된 것이다. 그러나 아직 완성(完成)된 것은 아니다. 교의학에서 말하는 바 구원의 서정(序程)의 7단계(부르심, 회개, 중생, 믿음, 칭의, 성화, 영화)에 의한다면, 대개의 우리는 성화(聖化)의 단계에 놓여 있는 것이고, 성화는 아직 구원의 완성이 아니다.

그렇다면, 구원받은 후에도 우리는 여전히 구원을 이루어야 할 책임이 있음을 바울 사도는 성령의 영감을 통하여 강조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의 길에 들어 선 이후일지라도, 구원의 완성을 위한 노력을 게을리할 때, 우리는 본문의 제자들처럼, 솔로몬이나 사울 왕처럼 오히려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서 신앙이 퇴보(退步)할 수도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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