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음으로 치료하는 기독교 문화사역자를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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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음으로 치료하는 기독교 문화사역자를 꿈꾼다”
  • 이덕형 기자
  • 승인 2012.02.17 11: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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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그우먼에서 영혼의 웃음전하는 목회자 자녀 정은지 씨

‘인천 유머짱’으로 방송과 개그의 꿈 키워
놓을 수 없는 꿈, 하나님 나라의 ‘웃음 사역자’

하늘 한 가득 차 있는 공기를 모두 들이마셔도 가슴이 답답했다. 그래서 가슴 속 깊은 곳에서 내뱉는 한숨 속에도 여태껏 단 한 번의 시원함도 없었다.

웃음. 그래서 가장 필요한 것이었다. 돌이켜 보면 비록 억지로 만드는 웃음이라도 정말 필요했다. 웃지 않으면 안 됐고 찡그리면 안 됐다. 가슴이 많이 찢어져도 슬퍼도 그렇게 견뎌내야만 했다.

그 모든 게 당연해야만 했던 정은지 씨는(인천충신교회) 목회자 자녀다.

# 상처와 신앙의 유산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나이, 두 발로 서서 다닐 수 있는 나이 때부터 배웠던 것은 ‘지는 법’이었다. 갖기 전에 나누어야 했고, 이기기 전에 언제나 져야했다. 민감했던 사춘기 시절에도 어렵던 시절에도 가장 힘들고 부족한 것은 언제나 정 씨 차지였다.

“그래서 목회자 자녀는 상대를 많이 살핍니다. 그런 시간이 계속 쌓여 이제는 상대의 피부색만 봐도 그에 대해 알 수 있습니다.”

초등학교 시절 친구들이 놀리던 달동네 단 칸 사택에서는 여기저기서 나오는 벌레 때문에 소름 돋던 기억만이 남아있다. 한 겨울에는 사방을 스트로폼으로 막아도 벽에서 세어 나오는 한기 때문에 밤새 가족들이 서로의 체온으로 잠을 청하기 일쑤였다. 언제나 성전이 먼저였기 때문에 교회가 커지기 전에 집은 없는 것이 철칙이었다. 화장실이 집안에 없어 고등학교 1학년 때까지는 가족 모두 요강을 사용했다.

어린 시절, 겨우 빌라를 마련해 이사 간 곳. 새 보금자리가 너무 좋아 동생들과 장난치며 뛰었을 때 고시생 아들을 둔 아래층 아주머니가 올라와 아버지께 한 말은 아직도 비수처럼 뇌리에 남아있었다. “목사님 그러시면 안 되죠. 기어 다녀요. 오리걸음으로 기어 다니라구요.”

그 말은 어린 은지의 가슴에 아로 새겨졌다. 그래도 목회자였던 정 씨 아버지는 명절때 마다 자녀들의 손에 햄이나 김 선물 세트를 손에 쥐어 아랫집에 직접 전해주게 했다.

아버지가 당하는 모습, 멱살 잡히는 모습, 작은 교회를 일으키며 받는 숱한 상처들. 그 모든 게 은지 씨에게는 짊어지고 가야할 신앙의 유산들이었다. 아버지 뒤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사모인 어머니와 함께 소화해야할 평생의 짐들이었다.

“예수님의 사랑을 닮아야 하니까, 그래야 하니까… 그렇게 살아가는 것은 평생 목회자 자녀로 가져가야 할 일이고 숙제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게 우리에게 주어진 아픔이었죠. 그래서 다른 사람들은 언제나 앞으로 가는데 우리는 뒤로 가는 것 같이 느껴졌습니다. 세상 시각으로 보면 윷놀이에서 뒷 도 인생을 사는 것 같습니다.”

22년을 그렇게 열심히 뒤로 달려왔다. 달려온 지난 시간 동안 정 씨에게는 몸과 마음에 상처가 남겨졌다. 정 씨의 오른손 검지 첫 번째 마디는 구부러져 펴지지 않는다.

어려서 손가락이 곪았을 때 바로 치료를 받지 못한 채 시간이 지나 그대로 굳어 한 쪽 마디가 펴지지 않는 것이다. 고등학교 시절 어렵게 목회를 하던 아버지가 “손가락 펴줄 게 병원에 가자”는 말에도 없는 살림에 부담되는 게 싫어 “피아노 치거나 생활하는데 아무 문제 없다”며 웃어넘긴채 지금까지 왔다. 군 복무시절 사고로 전신에 3도 화상을 입은 아버지는 그런 딸의 상처에 마음이 무너졌지만 가난한 목회자였기 때문에 견뎌내야만 했다.

같은 손가락 아래에 찢어진 상처가 하나 더 있다. 7살 되던 해 수요예배 때 벽돌 공장에서 놀던 중 한 집사님 아들이 던진 벽돌을 막다가 생긴 상처다.

# 인천 유머짱
정 씨는 중학교 2학년 때 처음 연극부에 들어갔다. 그 곳에서 자신이 밝은 성격이라는 것을 알았고 그래서 축제 때 무대에 자주 올랐다.

인천여상을 다니던 고등학교 시절에는 활발한 성격 덕분에 3년 연속 반장을 할 정도였다. KBS 탁재훈이 진행하는 ‘도전60초’ 프로그램에 나와 성대모사를 통해 공중파를 처음 탈 수 있었다. 학교에서 ‘도전골든벨’을 했을 때도 유머를 인정받아 혼자 남아 방송에 나갔다. 고등학교 2,3학년이었던 그 때부터 방송을 조금씩 하며 개그우먼의 꿈을 키워 나갔다.

“저팔계 목소리를 잘 내서 ‘유머 짱을 찾아라’에 합격해 유재석 진실게임에도 나왔습니다. 그 때부터 ‘인천유머짱’으로 알려지며 방송과 개그에 대한 꿈을 키워나갔습니다.”

그 때 쯤 재능대학교 피아노학과에 입학했다. ‘음’에 대한 감각이 있어 ‘시창청음테스트’에서는 늘 최고 점수였다. 정 씨는 음표는 모르는데 귀로 들리는 소리는 바로 알아낸다. 학교 홍보대사가 되어 홍보책자에도 나왔고 과대표 학회장에 음악계열 학회장으로 학교를 홍보하며 조금씩 인정을 받았다.

사회에 첫발을 딛던 22살 때 피아노 학원에서 1년간 선생님으로 일했다. MC 딩동의 소개로 대학로 ‘갈갈이 패밀리’ 소극장에서 갈갈이패밀리 엔터테이먼트에서 여자 개그맨지망생이 됐다. KBS 개그콘서트 여당당의 김영희, 최효종, 정범균, 류근지, 개그맨들이 다 같은 기수다.

“극장에 다니면 하루에 식권 한 장에 한 달에 20만 원을 받았습니다. 공채 개그맨이 아니면 사람취급을 안했기 때문에 모두 공채 개그맨을 목표로 이를 악물며 지낸 시간들이었습니다. 당시 주일성수를 하지 못한 것은 물론 신앙적으로 가장 많은 죄를 지었습니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개그우먼 활동’을 목표로 MBC 공채 시험을 봤다. 그런데 높은 점수에도 떨어져야 했다는 이야기가 주위에서 들려왔다. 정 씨에게는 살면서 찾아온 가장 큰 충격이었다. 떨어진 날 친구들을 모두 불러 호프집 술통을 다 비워냈다. MBC 개그맨 공채 사이트에 들어가 다른 친구들 합격한 공지를 보며 “왜 나는 안 되냐 며” 며칠 동안을 울었다. 그 순간에도 아버지는 뒤에서 항상 기도만 하셨다. 5년 전 23살 겨울 때 일이다.

회복을 위해 아버지는 천마산 갈멜산 기도원에서 10일만 지내다 오라고 권했다. 세상 것 다 내려놓고 다녀오라는 부탁이었다. 갈멜산 기도원. 하루 네 번의 예배. 7일간 28번 예배를 드렸지만 설교는 귀에 들어오지 않았고 변화는 없었다.

“2006년 2월 27일 수요일 7시. 하나님을 만나게 해달라고 매달려 기도했습니다. 새 교회로 옮긴 아버지가 교회 보수 중 사고로 발뒤꿈치가 으스러져 고쳐 달라는 기도와 함께 만나달라는 기도를 했는데 그 때 제가 지었던 죄가 필름처럼 지나갔습니다. 주님 품으로 돌아오라는 사인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정 씨는 그날 그 곳에서 은혜 받고 완전히 변했다. 그렇게 갈멜산 기도원 반주자가 된지도 4년이 지났다.

# 웃음을 전하는 문화사역자
“진짜 편하게 한 번 예배드리고 싶습니다. 목회자 자녀들은 내가 잘해야 아버지 어머니 얼굴에 먹칠을 안 한다는 생각에 가면을 씁니다. 그 가면이 무대 위 삐에로 모습과 많이 닮았습니다. 분장은 웃지만 실제 표정에서 입 꼬리는 언제나 내려와 있죠.”

세상에서는 웃기고 나면 그 뒤에 찾아오는 허무함의 공백이 너무 컸다. 웃고 박수 받을 때는 뭔가 된 것처럼 희열이 있지만 뒤돌아서서 그 무대가 끝날 때 밀려오는 허무함은 생각보다 크다고 정 씨는 말했다. 그리고 세상에서는 자신이 우울한데도 웃겨야 했다.

웃음이 직업이다보니 사람들은 언제나 “넌 우울한 건 안 어울려”라고 말했다. 스케줄이 있으면 가족이 죽어도 웃음을 만들러 나가야 했다. KBS 공채 개그맨 김병만 선배가 그랬다.

“그런데 지금은 하나님 나라 안에서 세상일은 안 합니다. 무조건 크리스천들에게 웃음을 주고 있습니다. 영혼들에게 웃음을 주고 있다는 생각에 웃던 안 웃던 늘 감사합니다. 그 사람들이 날 보고 웃고 있으면 하나님도 날 보고 웃고 있구나 하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래도 아직 가장 위험한 순간은 무대가 끝나 아이들이 박수 칠 때다. 교만해지기 쉬운 그 순간이 가장 위험한 때이다.

한 번은 삼천 명의 아이들이 모인 ‘브릿지임펙트’ 수련회에서 MC를 보며 뒤돌아섰는데 매일 MC를하고 싶다는 느낌과 함께 우울증이 찾아왔다. 목사님께 그 말씀을 드리니 “아이들이 박수치고 함성을 질렀지. 그거 하나님이 받은 게 아니라 네가 다 받은 거야.”라고 말했다.

웃기는 것에만 집중해 분위기에만 신경을 썼습니다. 교회적이지만 세상 것과 똑같은 모습. 그날 많이 울었고 또 한 번의 꺾임이 있었다. 다시 한 번 KBS 개그 공채시험에 도전했다. 1,118명이 접수해 1,2,3차까지 합격했다. 최종 70명 중에 20등 가까이 했지만 최종 순위에는 들지 못해 아쉽게 떨어졌다.

정 씨는 가장 깊은 곳에 숨겨진 개그맨의 꿈과 희망. 그날 마음 깊이 내려놨던 그 상처를 다시 한 번 끄집어냈다. 다른 사람이라면 하나님을 원망하고 쓰러졌을 것이다. 개그를 다시 놨을 때. 예전에는 죽고 싶었지만 지금은 견딜 수 있는 힘이 생겼다고 말했다. 그리고 목회자인 아버지로부터 온 한통의 문자는 그를 벼랑에서 건져올렸다.

‘사랑하는 내 딸아 세상 사람들은 결과를 중요시 하지만 하나님은 과정을 보신단다. 내 딸, 인정한다. 자랑스럽다.’

그날 나는 변화되었지만 변화되지 않은 세상으로부터 날 보호하신 하나님을 느꼈다. 그대로 나갔다면 세상으로 다시 빠져들었을 것이다.

“내게 아버지의 기도는 공기와 같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기도는 내가 세상 속에 묻히지 않고 영적으로 살아 숨쉬게 하는 공기가 되어주었습니다.”

정은지 씨의 꿈은 이제 기독교 안에 개그 팀 MC 팀을 만들어 웃음을 주는 것이다. 세상의 개그우먼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개그우먼이다. 미자립교회 어린이들과 목회자 자녀들과 함께 최고의 강사진과 최고의 장소에서 그들의 꿈을 회복시키고 상처를 치유하는 수련회를 하는 것이 삶의 목표이다.

“저는 목회자 자녀 한 명이 회복되면 하나의 교회가 회복된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웃음을 잃은 이땅에 문화사역자로 웃음을 전하는 것이 나의 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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