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르포] 자식같은 소를 떠나보낸 농민의 슬픔을 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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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르포] 자식같은 소를 떠나보낸 농민의 슬픔을 품다
  • 최창민 기자
  • 승인 2012.02.01 17:5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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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산농가 돌보는 유치리교회 최성관 목사

▲ 유치리교회의 최성관 목사는 “고통 받고 있는 그들과 함께 있는 자체가 농촌 목회의 시작입니다”라고 말했다.

강원도 홍천군에서도 국도를 타고 한참을 들어갔다. 남면 유치리는 그만큼 인적이 드문 곳이다. 최근 유치리 마을은 KBS 예능프로그램 ‘청춘불패’를 통해 사람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했다. 아이돌 스타들의 농가 체험이라는 이색적인 기획으로 시작된 이 프로그램의 배경이 바로 유치리 마을이다. 간혹 국도를 타고 지나가던 사람들이 ‘청춘불패’ 촬영지 간판을 보고 머무는 것 이외에는 여전히 사람들의 관심 밖이다.

# 유치리교회의 농촌 목회철학
이곳에 위치한 유치리교회도 농가와 논, 산자락을 배경으로 자리를 잡고 있다. 농촌교회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최성관 목사가 한적한 시골마을 교회에 부임해온 것은 1992년. 벌써 20년째 작은 농촌마을에서 사역을 해왔다. 보통의 젊은 목회자들이라면 농촌 교회 목회를 꺼린다. 환경이 열악한 탓도 있지만 열정적으로 자신만의 목회를 펼치기에는 아무래도 이런 저런 조건들이 턱없이 모자라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농촌 교회에 젊은 목회자가 부임해오면 마을을 오랫동안 지켜온 촌부들이나 아낙들은 으레 ‘몇 년 안 돼 가겠거니….’ 하며 대수롭지 않게 여기기 십상이다. 하지만 최 목사는 달랐다. 그는 입버릇처럼 “여기에 평생 사역자로 왔다”고 말한다.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도 한 교회를 20년째 지켜내고 있다.

“처음에는 저도 이방인이었습니다. 농촌에서 정착해 그 마을 주민과 가족처럼 지내기까지는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10년이 지나서야 마을 사람들이 저를 받아들인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유치리교회는 마을의 학교에 매년 장학금을 마련해 남몰래 기부했다. 또 성탄절이 되면 마을 사람들에게 떡을 돌리며 성탄의 기쁨을 함께 나눴다. 마을의 큰일도 도맡아 했다. 매년 여름이면 일손이 부족한 농가들을 위해 도시의 큰 교회에서 청년들을 초청해 농촌 봉사활동을 펼쳤다. 교회가 마을을 돕고 있다는 사실이 입소문을 타고 자연스럽게 퍼지자 마을 사람들도 점차 교회를 가깝게 느끼게 된 것이다.

유치리교회는 1989년 1월 29일 천막교회로 시작됐다. 올해로 23주년을 맞은 교회는 농촌교회로서는 보기 드문 수려한 모습을 갖추고 있다. 1994년 시작해 1996년에 완공된 유치리교회 건물은 국도변을 타고 가다보면 한눈에 들어올 정도로 넓다.

최 목사는 교회 부임 후 4년 만에 성도들과 함께 이 교회를 완공했다. 교회 건축 과정에서도 그의 목회 철학이 고스란히 묻어났다. 최 목사는 “교회는 본디 마을과 함께 해야 한다. 마을보다 너무 앞서거나 어긋나면 교회로서의 역할을 할 수 없다”고 말했다.

최 목사는 교회를 건축하면서 보통 교회 건물 뒤나 옆에 배치하는 선교관을 교회 정면에 지었다. 마을 사람들이 선교관을 먼저 드나들면서 친근함을 느낀 후에 교회를 찾을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교회는 선교관에서 마을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음악 교육, 발마사지, 마을 잔치 등 다양한 봉사활동을 펼치고 있다.

또 나무와 흙벽돌을 소재로 해 주변 경관을 헤치지 않도록 노력했다. 오히려 마을 어귀 위치한 교회 덕에 마을의 풍경이 한결 정감 있다. 교회를 지으면서도 농촌을 생각했던 최 목사의 고민이 느껴졌다.

최 목사는 국도변 마을 맞은편에 있는 군부대 교회 벧엘교회에서 협동목사로 섬기고 있다. 군부대 장병들을 아들처럼 가르치며 함께 동고동락하고 있는 것이다. 유치리교회 안에 높이 솟은 나무십자가가 걸려 있다. 교회를 건축한 후 70세 노부부가 십자가가 필요하다는 말을 듣고 산에서 직접 나무를 깎아서 만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큰 나무십자가를 군부대 장병 10여 명과 함께 예배당에 달았다. 예배당에 높게 내걸린 나무십자가만큼 교회는 마을과 군부대에 복음을 선포하고 있었다.

# 축산농가의 아픔을 돌보다
아무런 사건 사고도 없을 것 같은 이 마을은 지난해 구제역 파동으로 인해 한차례 큰 홍역을 치렀다. 지금도 교회 옆에는 당시에 소를 매장했던 매몰지가 덩그러니 언덕을 이루고 있었다.

또 교회 바로 옆에서 축산업을 하며 꿈을 키워온 마을 주민도 지난해 구제역 파동 이후 축사를 방치해놓고 있었다. 자식처럼 키우던 소를 생체로 묻은 이후 더 이상 소를 지켜볼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일대 모든 생활기반이 마비됐어요. 여기에서 1.5km 떨어진 돼지 농가에서 구제역이 발병한 이후 1만3천5백두의 가축이 매몰됐습니다.”

최 목사는 축산농가 문제에 관심이 많았다. 구제역으로 인한 여파는 상상을 초월했다. 당시 열 가구 중 다섯 가구가 피해를 입었다. 특히 마을 주민들의 정서적인 문제는 심각한 수준이었다. 서로 반목하고 갈등하는 일이 빈번해졌다. 구제역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옮겨진다는 점 때문에 마을 사람들도 상호간에 접촉을 피했다. 이 때문에 교회를 찾는 성도들의 발길도 뚝 끊겼다. 아예 농촌을 떠난 사람들도 있었다.

“시간을 두고 기다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성도들을 위로하고 이끌어주시기를 기다리며 기도했습니다.”

농촌이 죽으면 농촌교회도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최 목사는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만큼 그는 간절하게 기도했고 마을을 섬겼다. 작년에는 축산농가의 어려움을 덜어주기 위해 교단 농촌선교부와 손잡고 송아지 분양사업을 펼쳤다.

형편이 어려운 축산농가에 암송아지를 분양해주고 그 소가 자라서 새끼를 낳으면 다시 그 송아지를 다른 집에 분양해주는 시스템이다. 현재 13가구가 이 사업을 통해 소를 키우고 있다. 또 도농 간 직거래를 통해 농가소득을 높이는 일에도 힘써오고 있다.

구제역으로 한바탕 소동을 빚었던 마을은 최근 소값 폭락으로 인해 다시 한 번 큰 시름에 빠졌다. 이 때문에 최 목사의 고민도 깊어졌다.

“자유무역협정이 체결되고 외국에서 소가 대량으로 헐값에 들어오면서 소값이 계속 폭락하고 있어요. 250만 원 정도하던 암소 송아지가 지금은 90만 원대입니다. 사료값도 계속 올라서 지금은 한 마리를 키우면 오히려 120만 원씩 손해를 보는 형편입니다.”

최 목사는 축산업자가 결코 아니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과 고민을 자주 나누다보니 자연스럽게 알게 된 지식이다. 최 목사는 “농촌에서 목회를 하려면 그들과 동화되려는 마음이 필요하다. 같이 있어줘야 한다. 함께 고추를 심고, 함께 나물을 캐고, 함께 소를 키워야 한다”고 말했다.

최근 정부가 축산농가 회생 대책을 내놓았다. 크게 떨어진 송아지값 일부를 보전해주기로 했다. 또 군부대에 보급하는 소를 한우나 국내산 육우로 대체하는 방안도 추진된다. 치솟았던 사료값도 낮추는 방안을 간구하기로 했다. 이와 함께 가장 큰 문제로 지적됐던 유통구조 개선에도 나선다.

세계화 시대. 한적한 농촌에서 늙은이가 운영하는 축사도 세계적인 축산 대기업이 운영하는 대량 목축업과 경쟁해야 한다. 비단 축산농민뿐 아니라 논밭을 일구는 농민도 마찬가지다. 사회가 배려하지 않으면 농촌은 죽어갈 수밖에 없다. 최 목사가 계속 농촌 교회를 지켜야 하는 이유다. 최 목사의 농촌 목회 철학이 뇌리를 스친다.

“나는 농촌에 목회를 하러 왔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들과 함께하려고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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