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 르포] “우리에게도 남들과 같은 내일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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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 르포] “우리에게도 남들과 같은 내일이 있어요”
  • 이덕형 기자
  • 승인 2012.01.18 18: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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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과 함께 한 2012년 감리교회 ‘정동진 해돋이 희망열차’ 여행


보육원·신장병 투석·농촌지역 어린이 350여 명 참여
정동진 등 동해안 여행하며 내일을 향한 희망의 꿈 키워

영등포역, 밤 11시가 가까워지는 늦은 시간인데도 제법 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한 곳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두꺼운 방한복 차림의 아이들.

구내 시계가 10시 54분을 가리키자 여섯 량으로 구성된 기차가 영등포역에 들어와 멈춰 선다. 6번 플랫폼에서 기차를 기다리던 아이들은 마냥 들뜬 표정으로 재빠르게 기차에 올라탄다.

‘2012년 감리교회 정동진 해돋이 희망열차’. 인천역에서부터 달려와 잠시 멈췄던 열차는 다시 속력을 내며 강원도 동쪽 해변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 편히 웃어본 기억이 없어
쿠크다스, 버터와플, 땅콩샌드, 치즈샌드, 쭈쭈크래커가 비닐가득 한 묶음으로 어린이들의 손에 들려있다. 아이들의 얼굴에는 벌써부터 얼굴 가득 함박 웃음꽃이 피었다.

인천ㆍ부평 지역의 보육원 어린이 3백 명과 서울대병원 어린이 신장병 환우 20여 명, 강원도 횡성 둔내지역의 어린이 80여 명이 오늘 밤을 달려 정동진으로 해돋이를 가는 길이다. 아이들은 모두 설렘에 휩싸였다. 벌써 골아 떨어졌어야 할 시간. 하지만 오늘 하루만큼은 피곤하지 않다. 몸과 마음도 웃음과 기쁨도 부자인 날이다.

강원도 횡성 둔내초등학교에서 온 박용권 어린이는 “과자가 너무 많아 기분이 좋았어요. 남는 과자는 더 먹고 싶은 친구들에게 나눠줬어요”라고 말했다.

하나하나 과자를 뜯어 종류별로 아이들의 손에 가득 나눠주는 원장 선생님. 각자 손에 든 봉지와 바구니엔 벌써 과자가 한 가득이다.

살면서 이렇게 웃어본 기억이 있었던가. 태어난 지 10여 년이 훌쩍 넘었지만 아이들의 기억 속엔 마음 편히 웃어본 흔적들이 없다.

어린 나이로 그동안 지내온 쉽지 않은 힘든 순간들, 남들에겐 평범했던 순간이 왜 이리도 멀었는지 모르겠지만 어린 마음에 다가온 지금 이 순간이 흐르지 못하게 붙들어두고 싶어, 달이 기울고 해가 돋을 때까지 잠들지 않고 이야기꽃을 피우는 아이들도 제법 많았다.

먹다 남아 창가에 늘어선 과자 선물꾸러미는 오늘 하루 기쁨의 상징이다.

# 아름다운 꿈, 소중한 인생
휠체어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24살 류나 양은 급성골수백혈병 환자다. 치료 기간 중에 닥친 심장마비로 심폐소생술을 했지만 결국 하반신에 마비가 찾아오고 말았다. 아픈 후 나서본 적 없는 여행길. 심장마비로 죽음의 문턱까지 다녀온 이후 처음이다.

엄마와 함께 나서는 정동진 여행. 아픔을 이겨내고 슬픔을 버릴 수 있는 즐거운 기억, 웃었던 기억을 찾기 위해 기차에 몸을 실었다. 그동안 알고 지냈던 5살 정도 어린 친구가 옆에서 계속 말동무가 되어준다.

“다리가 아프면 팔 힘이 많이 필요해요. 그래서 국립재활원에 들어갔을 땐 처음에는 팔 힘부터 길렀어요. 아침 9시부터 저녁 8시까지 이어지는 재활훈련은 스파르타식이었죠. 그 기간 동안 일상에서 스스로 움직일 수 있는 방법을 공부했어요. 혼자 할 수 있는 능력을 이 기간 중 많이 익혔어요.”

국립 재활원에서는 먼저 혼자 침대에서 휠체어로 몸을 옮기는 법을 배웠다. 이후 변기에서 휠체어로, 자동차에서 휠체어로 옮기는 배우는 법을 단계별로 순차적으로 몸에 익혔다. 류나 양은 기차여행을 떠나기 5일 전인 지난 11일, 운전면허 2종 보통에 도전해 합격했다. 두 번만의 합격. 쉬지 않고 도전의 영역을 하나씩 넓혀가는 중이다.

이제는 핸드브레이크만 있으면 휠체어와 함께 혼자 이동하는데도 크게 어려움이 없다. 다리가 아프기 전 약간 경사진 명동 거리를 크리스마스에 사람들 사이에 끼어 밀려다닌 기억도 있다. 하지만 이제는 어디로 떠나는 일조차도 특별한 일이 되어버렸다.

지하철 포커스 신문에 사연을 보내 당첨됐던 일이 화제에 올랐다. 아버지가 보낸 사연이 먼저 채택됐고 이후 딸의 마음을 담은 답장도 함께 당선됐던 것이다.

“아버지 선물로 화장품이 도착해 모두들 즐겁게 웃었어요. 특별한 기억은 야구를 좋아했던 아버지를 따라 부산 사직구장을 3일 연속 간적도 있어요.”

사연이 당첨됐으니 이미 작가라는 이야기부터 좋아하는 음식, 일상의 소소하지만 다양한 요소들이 재미난 재료로 철길을 따라 흐르는 이야기가 되어주었다. 새벽까지 이어진 이야기는 이후 다음 날을 위한 수면의 시간으로 이어졌다.

새벽 2시 25분 모두가 잠든 시간. 그림자 하나가 분주히 움직인다. 어둠 속에서 금속음이 들리면서 휠체어가 다시 펴졌다. 그 위로 엄마와 딸의 형체가 보인다. 흔들리는 열차 안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휠체어로 옮겨 앉는 모습.

엄마와 딸은 지금까지 같은 꿈을 갖고 그렇게 긴 시간을 보내왔다.

# 떠오른 태양에 희망을 싣고
목적지에 도착하니 하늘은 아직 깜깜했다. 모두 자신만의 꿈을 안고 해변가로 발길을 옮겼다.

“올해 수능을 봤어요. 보건관리전공과 사회복지학과에 지원했는데 제가 바라는 학과에 합격하는 소망이 이루어졌으면 좋겠어요.”

류나 양의 새해 소망이다. 어머니 박경애 씨는 새해 소망으로 딸의 행복과 건강을 기도했다.

겨울바닷바람이 입고 간 두툼한 옷을 비집고 들어간 듯 모두 잔뜩 움츠러든 모습이다.

해가 뜨기 전까지 불꽃놀이가 이어졌다. 작은 불꽃들이 여기 저기 하늘을 수놓는다. 내 꿈을 하늘에 새기듯 하늘로 향하는 불꽃에 마음을 담는다.
 
‘펑’소리와 함께 불꽃이 솟아오르면 아이들의 함성도 따라 커지고 불꽃에 따라 아이들의 아쉬움도 사그라든다.

코레일 부천역에서 근무하고 있는 김창호 씨는 새해 소망으로 코레일 민영화의 과정이 순조롭게 풀리길 바라는 소망을 전했다. 또한 함께 한 어린이들에게는 “비록 어려운 환경에 있지만 그 속에서 일어나 주위의 많은 관심으로 미래를 향해 힘차게 나갔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했다.

부천서부에 있는 글로리아 봉사단에서 참여한 박성희(48) 씨는 “아이들이 생각보다 밝고 활발해 다행”이라며 ”그 밝은 모습이 사춘기를 지나 성장할 때까지 사라지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말을 전했다. 이어 “작은딸이 올해 수능을 봤는데 꼭 원하는 학교에 합격했으면 기도한다”는 간절함도 함께 담았다.

철로에 떨어진 아이를 구하다 두 다리를 잃은 김행균 개봉역장은 “기차를 타고 올 때 굳어 있던 아이들의 얼굴이 시간이 지나면서 서서히 살아나는 것을 볼 때 찾아오는 기쁨은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면서 “여행을 계기로 어린 친구들이 좀 더 큰 마음으로 성장해 타인에게 관심과 배려를 전할 수 있는 사람으로 성장하길 바란다”는 소망을 함께 전했다.

차가운 바닷바람 속에 양 볼이 발갛게 상기됐다. 추운줄도 모르고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는 아이들. 하얀 눈이 가득한 눈썰매장을 오르내리는 아이들.

대회를 주최한 생명을나누는사람들 조정진 목사는 “아이들의 이런 기억이 그들이 만들어갈 미래와 사회에 배려와 관심으로 나타난다”며 많은 관심을 부탁했다. 해돋이 이후에는 용연동굴 탐험과 석탄박물관 눈썰매 일정이 진행되면서 2012 정동진 희망열차 여행도 끝이 났다. 무박 2일간 이어진 짧은 일정. 하지만 지난 2009년과 2010년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인해 중단된 이후 3년 만에 다시 부활한 희망열차 여행이어서 그 의미는 더 컸다.

이번 희망열차는 기독교대한감리회 중부연회와 경인지역의 20여 교회가 성탄헌금을 후원하면서 다시 움직일 수 있었고, 감리교회가 지난 2008년부터 성탄헌금을 통해 희망열차의 운행을 후원해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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