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년르포] 한 템포 쉬어 가, 걸으면 결국 닿게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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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년르포] 한 템포 쉬어 가, 걸으면 결국 닿게 돼
  • 공종은 기자
  • 승인 2011.12.22 11:2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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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해의 끝자락, 안산에서 만난 사람들

시장. 도시생활이 몸에 밴 사람들에게는 그리 익숙하지 않은 곳이다. 시장보다는 왠지 대형 마트나 백화점에 가야 어울릴 것 같고, 시장에서 파는 물건들과 음식들은 질이 떨어지거나 맛과 청결문제를 보장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앞선다. 하지만, 그래도 그곳은 여전한 삶의 현장. 사람들의 생활이 있고 눈물과 기쁨이 있다. 오히려 시장에서 부딪히는 이들의 삶은 더 치열하고 사랑은 더 끈끈하다.

아직 크리스마스 캐럴이 흘러나오는 안산의 한 구석. 라성시장에서의 12월의 하루. 한 해의 마지막을 향해 줄달음치는 날들을 붙잡으려는 이들의 가쁜 호흡과 맥박은 차가운 겨울 한기를 녹인다. 이곳은 낱선 이국인들의 모양새와 말투가 더 이상 낯설지 않은 곳. 우리와 닮은 피부의 사람이든 그렇지 않든 이젠 한 가족이 됐다.
지하철 4호선 공단역 맞은 편 라성호텔 주위에 형성된 시장. 그래서 이름이 ‘라성시장’이다. 별다른 의미는 없다. ‘어떻게 호텔 주위에 시장이 형성됐을까’ 하는 의문도 들지만 동네를 살피다보면 가능하다는 생각이 먼저 앞선다.

# 많이 팔아야 하루 삼만 원

한 대의 시내버스가 정류장에 정차해 한무리의 승객들을 내려놓고 허연 입김을 내뿜으며 줄달음을 친다. 겨울 찬기에 버스도 잔뜩 얼어있는 듯 하다. 차에서 내린 승객들의 모습은 잔뜩 움츠러들어 있다. 눈만 빼꼼히 내민 채 줄달음치던 여인이 발길을 돌린다. 도로로 성큼 내려선 여인이 몸을 굽혀 길에 떨어진 작은 신발 한 짝을 냉큼 주워 챙긴다.

아이를 안은 여인. 동남아에서 시집 온 듯하다. 그 추운 날, 평생 한번 만나보지 못했을 칼바람에 아이를 들쳐 안았다. 꽁꽁 사맨 포대기 밖으로 아이의 신발 벗겨진 한쪽 발이 삐죽 나와 있다. 보채는 아이를 서툰 한국말로 어르며 시장 속으로 서둘러 사라진다.
“여기 저런 사람들 많아.”
길거리에 좌판을 편 할머니의 설명이다. “외국에서 시집을 왔거나 여기서 자기 나라 사람 만나서 애 낳고 사는 사람들이지. 그런데 대부분 결혼식은 안 올리고 사는 경우가 많아.”

할머니가 자리를 잡은 곳은 시장 귀퉁이. 시장에 들어가지 못하고 길 언저리에서 맴돌기만 한다.
“시장에 자리를 잡기가 쉬운 줄 알아? 그것도 돈이 있어야지 나같이 나물 나부랭이나 파는 사람이 어떻게 시장에 자리를 잡겠누? 여기서라도 쫓겨나지 않고 장사할 수 있는 게 다행이야.”
할머니의 가게는 길바닥. 좌판이고 뭐고 랄 것도 없다. 빨간 플라스틱 바구니에 담긴 들기름 한 병, 시금치와 콩, 몇 가지 나물들이 품목의 전부다. 하루 종일, 그리고 매일 이렇게 차려놓고 판단다.
“많이 팔아야 하루 삼만 원이야.”

또 한귀퉁이에 자리잡은 뻥튀기가게. ‘한 봉지 2천 원’. 커다란 글귀가 눈길을 잡아끈다. 좌판 위에는 갖가지 뻥튀기들이 푸짐하게 자리를 잡았다. 모양새가 커서 그런지 할머니의 좌판에 비해서는 모양새가 더 난다. 하지만 관심을 갖는 손님들은 보이지 않는다. 그나마 이것마저도 살까말까 망설인다.

뻥튀기 아주머니의 시선이 순간 옆으로 향한다. 아직 김장을 담그지 못한 듯 열댓 포기 배추를 사 작은 끌개에 동여매는 아저씨의 폼이 영 미덥지 못한 눈치다. 한걸음에 내달려 척척 묶는다. 힘센 아주머니에게 일을 뺏긴 아저씨의 멋쩍음이 머리를 쓸어 올리게 한다. ‘내 것 팔지 않았어도 어떤가. 다 내 손님이다’고 생각한다.

시장 한모서리 차지하지 못해 이 할머니와 아주머니는 거리에서 산다. 1년 365일, 비가 오나 눈이 와도 거리로 출근한다. 이들이라고 번듯한 좌판 하나 벌이고 싶지 않겠나. 하지만 여전히 이 할머니의 자리는 거리다.

# 국물 한 사발로 달래는 한기

라성시장에서 자동차로 20여 분 떨어진 본오동 일대. 상록수역에서 5백여 미터를 올라가면 도심지 아파트촌 사이에 작은 시장이 들어앉았다. 바로 옆으로는 대형 쇼핑센터가 떡 버티고 있다. 지하 식품매장에는 장을 보려는 사람들로 붐빈다.

밖으로 나와 거리를 둘러본다. 역시 여기도 대조되는 풍경. 라성시장과 별반 다르지 않다. 길에 좌판을 깐 상인들의 행렬이 줄지어 있다. 그나마 비닐천막을 두른 가게는 형편이 나은 편. 그마저도 마련하지 못한 사람들은 찬바람을 고스란히 맞고 있다. 리어커 위에 진열된 상품들 위로 세찬 바람이 훑고 지나간다.

‘땅 땅!’ 맑은 쇳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머리 허연 엿장수 할아버지, 팔리지 않는 엿을 자꾸 쳐댄다. 포장해 놓은 것도 많은데 자꾸 쳐댄다. 땅 하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하얀 조각 엿이 ‘튕’ 하며 떨어져 나온다. 10개를 넣어 한 상자를 만든다.

엄마의 손을 잡은 꼬마아이. 엿 파는 할아버지 앞에 멈춰 선다.
“엄마. 나, 이 거 사 줘!”
“안돼. 이거 불량식품이야!”
순간 할아버지의 얼굴이 굳어진다. 그렇다고 뭐라고 대꾸도 하지 않는다.
“요즘 엄마들은 애들한테 이런 거 안 먹여.” 할아버지의 목소리에서 힘이 빠져나간다.
아이의 손을 잡아 챈 아기 엄마. 근처의 페스트푸드점으로 아이를 데리고 들어간다. 울듯하던 아이의 얼굴이 환하게 펴진다. 유리창 하나 사이로 별천지가 펼쳐진다. 크리스마스 캐럴이 흘러나오고 따뜻한 온기와 아이들의 웃음이 가득하다.

걸음을 돌려 반대편 길로 접어든다. 귀퉁이에 자리잡은 휴대폰 판매 대리점. 연인으로 보이는 남녀 3쌍이 휴대폰을 고르는데 열중해 있다. 여자 친구에게 선물로 사주는 것일까. 아니면 자기 휴대폰을 바꾸는 것일까. 두 사람 다 함박웃음이다. 외부로 흘러나오게 설치된 스피커에서는 빠른 템포의 노래들이 쏟아져 나오고 거리의 시장 풍경 위로 울려 퍼진다.

몇 걸음 떨어진 신발가게. 사이즈를 묻는 손님에게 주인은 “안으로 들어와서 신어보세요” 라며 잡아끈다. 추위에 떠는 손님을 위한 배려다. 손님은 추위에 떠밀려 냉큼 안으로 들어선다. 여기도 손님은 별로 없다. 너무 추운 날씨 때문일까. 아니면 풀릴 듯 풀리지 않는 경기 때문일까. 좌판 상인들은 “하루 5만 원 벌기도 힘들다”는 하소연을 쏟아놓는다.

그나마 따뜻한 국물을 파는 집에는 손님이 든다. 추운 손, 빈속. 국물 한 사발로 녹인다. 허연 김 무럭 뽑아 올리는 국물 후후 불어가며 시린 속을 달랜다. 어묵 한 꼬치에 5백 원. 두 꼬치 먹으면서 들이킨 국물 한 사발에 속이 든든하다.
다른 사람들한테는 미안하지만 날씨가 더 추워졌으며 좋겠단다. “우리는 날씨가 추우면 추울수록 장사가 잘 돼요. 이것도 한철이잖아요.”
소박하다 못해 너무 정직한 말. 어묵장사에게는 추운 겨울이 제철이고 날씨가 추워야 그나마 제대로 장사가 되기 때문이리라. 날씨가 춥기를 바라는 어묵장사를 누가 뭐라 하겠나.

길을 건너는 부부. 아이의 양 손을 한쪽씩 붙잡았다. 장갑도 끼지 않는 맨손이 쓱 드러난다. 종종걸음을 치던 부부. 양말과 장갑을 파는 좌판 앞에 섰다. 아이의 얼굴이 금세 환해지며 손가락으로 “이거”하며 가리킨다. 알록달록한 양말.

‘손이 시려워 장갑을 찾겠지’ 하는 생각은 빗나갔다. 시린 손보다 그게 더 예뻐 보였나보다. 아이들의 생각은 이렇듯 늘 어른들의 설익은 관념을 비웃는다. 이것저것 한참을 고르던 아이는 핑크빛 양말과 장갑이 담긴 까만 봉투를 들고 신나게 달음질친다. 걱정근심 하나 없는 해맑은 얼굴이다.

# 휴일에도 쉬지 못하는 사람들 

“시화호 쪽으로 넘어가는 석양이 아름답다”는 상인의 말에 호수공원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시화방조제가 만들어지면서 이제는 바다로서의 가치를 잃어버린 널따란 평지가 눈앞에 들어온다. 수만 평, 아니 수십만 평. 차로 달려도 30여 분은 달릴 수 있을 듯하다. 그 너머로 야트막한 산이 보이고 그 사이로 펼쳐진 평지에는 군데군데 들풀들이 솟았다. 마치 이곳은 또 다른 비무장지대. 사람들의 발길을 거부한 채 십수 년 동안 이렇게 자연이 됐다.

고개를 조금 돌리면 높다랗게 솟은 시화공단의 굴뚝들이 눈에 들어온다. 공단 도시. 아직 안산은 공단도시라는 이미지를 벗지 못했다. 그것이 속상하단다. 하지만 태양이 넘어가는 길목에 자리잡은 안산은 그림처럼 아름답기만 하다. 갈대가 스산한 바람에 일렁이면 석양을 받은 금빛 물결이 일렁이고 그 위로 낮게 무리 짓는 물오리 떼는 할 일 없이 한 해를 허비한 사람들의 마음을 어루만진다.

불과 백여 미터. 높게 솟은 굴뚝은 휴일인데도 여태 허연 김을 뽑아 올리고 있다. 누가 오늘도 나와서 밀린 일을 하는 것일까. 집으로 가지 못하고 아니, 돌아가는 공장의 기계를 끌 수 없어서 그런 것일까. 저 곳에 있는 사람들은 “그래. 난, 이만큼 했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으리라.

한 해를 마감하는 이들의 걸음은 여유롭다. 시장에서 만났건 거리에서 만났건, 노을 지는 호숫가에서 만났건 모두들 여유를 담아냈다. 마지막을 서두름으로 맞는 이들을 비웃듯 오히려 시장에서 만난 사람들은 도시인들의 빠듯함을 위로한다.

“걸으면 결국 닿게 돼. 뭘 그렇게 서둘러? 달음질친다고 얼마나 빨리 가겠어. 예전에는 서울 길도 걸어서 갔다 잖아. 한 템포 쉬어 가. 그게 오히려 더 빨리 가는 길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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