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 만에 되찾은 푸른 바다, 사람들 신음은 아직도 쟁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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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 만에 되찾은 푸른 바다, 사람들 신음은 아직도 쟁쟁
  • 최창민 기자
  • 승인 2011.12.19 1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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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 르포]/ 태안은 기독교 연합 봉사 운동의 태동지… 생태적 신앙 전승해야

자연은 회복되고 있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아파
한국 교회에 생태적 회심의 기회 준 곳 기념해야

‘내년 봄에는 쭈꾸미를 잡아 올릴 수 있지 않을까?’

모자를 푹 눌러쓴 한 노인은 서너평 남짓한 비닐하우스에서 소라 껍데기를 다듬고 있었다. 1년에 두어 번 바닷소리를 접하는 도시 객들에게는 파도 소리가 꽉 막힌 마음을 시원하게 뚫어주는 청량제처럼 다가올 테다. 하지만 너른 태안 앞 바다를 터전으로 삼고 기십년은 족히 살아온 바닷사람들에게 길어 올릴 것이 없는 바다는 주름진 어깨를 짓누를 뿐이다.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이 노인은 바다 속에서 아무것도 건져 올리지 못했다. 잡히는 것들은 죄다 죽었거나 버려진 것들뿐이었다.

“어르신 무얼 하시는 건가요?”

조심스럽게 말을 건냈다. 가까이 다가가자 좀처럼 말대답을 해주지 않을 것처럼 잔뜩 웅크려 일손을 분주히 움직였기 때문이다. 역시 아무 대답이 없었다. 질문을 바꿨다.

“어르신 바다가 많이 깨끗해졌네요?” 이 질문에 노인의 마음이 동했다.
“바다야 깨끗해졌지. 매일 바닷물이 쑤욱 들어왔다가 빠져나가기를 반복했으니….”
단순하지만 참 과학적인 설명이라는 생각이 스칠 때 쯤 푸념 섞인 목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어장에서 몇 년간 아무것도 못 건졌지. 굴양식은 아예 포기했고.”
바다는 깨끗해졌지만 여전히 무언가를 잡아 올릴 수 없다는 것. 겉은 평온해보이고 깨끗해졌지만 속은 치유돼야할 부분이 아직도 많이 남아있다는 것을 몇 마디 말에 섞어 내뱉은 것이다. 이 노인에게서 태안 주민들의 마음을 들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2007년 12월 7일 충남 태안군 만리포 북서방 8㎞ 해상에서 유조선과 크레인이 충돌했다. 이 사고로 원유 약 1만2천KL가 유출됐고 갯벌, 어장, 해안 등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서산 가로림만에서 태안군 안면읍 내파수도까지 167km에 이르는 해안 전체가 검은 기름으로 물들었다. 바다 생물은 물론 해안의 동식물, 이를 벗하고 살던 주민들의 삶까지 죽음으로 몰아갔다.

그로부터 4년이 지난 지금, 강석만 씨(67세)는 다가오는 새해에 첫 수확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는 소라 껍데기를 밧줄에 엮어 ‘쭈꾸미통발’을 만들고 있었다. 사고와 함께 오랫동안 창고 구석에 너저분하게 널려 있던 통발을 꺼낸 것은 지난해 이맘때쯤. 하지만 올해 초에는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내년 5월 즈음에 이 통발을 바다 속에 가라앉히면 빈껍데기 속에 쭈꾸미가 집인줄 알고 들어가. 껍데기 끝에 구멍을 뚫어 밧줄에 엮으면 줄줄이 낚여 올라오지. 잘 잡힐 때는 한 150Kg 정도씩 잡았지.”

4년이나 지났지만 쭈꾸미를 소라 껍데기로 유혹해 잡던 기억이 되살아났던 것일까. 강 씨는 쭈꾸미통발을 설명하면서 처음으로 미소를 지어보였다. 하지만 강 씨는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피해 보상금 문제를 꺼내며 다시 우울해졌다. 이 때 마을길 너머에서 찬양 소리가 들려왔다.

“작은 불꽃 하나가 큰 불을 일으키어 곧 주의 사람들 그 불에 몸 녹이듯이…. 새싹이 돋아나면 새들은 지저귀고 꽃들은 피어나 화창한 봄날이라네. 주님의 사랑 놀라워 한 번 경험하면 봄과 같은 새 희망을 전하고 싶으리.”

4년 전 이곳을 찾아 차가운 바다바람을 맞으며 돌 하나, 틈 사이에 뭍은 기름을 닦았던 자원봉사자들의 찬양소리가 작은 교회당을 가득 매웠다. 사고 이후 약 6개월 동안 서해안을 살리기 위해 자원봉사자로 참여한 사람은 120만 명. 이중 80만 명이 기독교인이었다. 4년여 만에 다시 태안에 온 성도들은 설렘과 기대로 가득 찼다.

지난 5일 충남 태안군 소원면 의항2리 의항교회에서 ‘한국 교회 서해안 살리기 자원봉사 기념비 제막 및 전시관 개관식’이 열렸다. 이 자리에는 4년 전 사고 당시 태안을 찾았던 자원봉사자들을 비롯해 봉사자들을 맞았던 지역 교회 목회자와 성도 등 200여 명이 참석했다.

만리포교회 유성상 목사는 “2007년 12월 7일 태안 앞바다는 마른하늘에 날벼락처럼 한순간에 죽음의 바다가 됐다”며 “경악과 슬픔, 분노의 시간에 온 국민이 함께 하얗고 노란 인간 띠를 만들어 검은 절망을 걷어냈다”고 말했다.

태안군기독교연합회 회장 서광희 장로는 “4년 전 훼손되고 파괴된 생태계를 하나님이 깨끗하게 하시고 온전하게 하심을 믿는다”며 “예고 없이 일어났던 재앙이 많은 기독교인들에게 교훈을 줬다. 재앙의 현장에서 한국 교회는 하나가 됐다”고 그때를 회상했다.

이날 예배에서 설교를 전한 한국교회희망봉사단(이하 봉사단) 총무 최희범 목사는 “범 교단이 참여하는 연합 봉사운동은 2007년 서해안 기름유출 사고가 있은 후부터 시작됐다”며 “하나 되어 섬기며 섬기면서 하나 되자라는 당시의 표어는 한국 교회 봉사의 모토가 됐다”고 말했다. 최 목사는 “섬김의 기쁨과 나눔의 행복은 기독교에서 선택 사항이 아닌 필수 사항”이라며 “하나 되지 못하고 갈등하는 한국 교회가 봉사를 통해 다시 하나 되는 운동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봉사단 사무총장 김종생 목사는 “한국 교회는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는 성경 말씀에 어떻게 응답할지 고민해 왔다”며 “2007년 이곳에서 봉사단을 통해 2천 교회 17만 명의 자원봉사자들이 서해안 살리기에 동참했으며, 개신교 전체 1만 교회 80만 명이 다녀갔다”고 말했다. 이어 “당시 한 권사님이 ‘성장과 발전밖에 몰랐던 우리의 욕심을 회개해야 한다’고 쓴소리를 했던 것이 기억난다”며 “한국 교회 전체가 하나 되어 태안의 아픔에 동참했던 상징적인 현장에 기념비를 세워 신앙의 후손들에게 귀한 유산을 물려줄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자원봉사 기념비는 의항교회 이외에도 만리포교회, 천리포교회, 신두리성결교회, 파도교회, 학암포교회 등 총 여섯 곳에 세워졌다. 또 한국 교회의 방제 작업과 봉사 내용을 기록한 전시관이 의항교회 마당 한편에 세워졌다. 전시관에는 당시 사용했던 방제복과 방제기구, 오염된 돌과 바닷물, 죽은 어패류 등이 전시돼 그날의 아픔을 기억하고 경각심을 갖도록 꾸며졌다. 이와 함께 봉사단은 태안에 생태학교를 개교해 창조질서 보존의 사명을 전수할 계획이다.

이날 예배에서 봉사단은 사랑의교회 사랑의나눔119, 군포제일교회 성민원 등 기관과 김범곤 목사(예수사랑선교회), 성백걸 교수(백석대), 서광희 장로, 오창영 목사(천리포교회), 유성상 목사(만리포교회), 이광희 목사 등에게 공로패를 수여했다.

생태학교 교장을 맡은 양재성 목사는 “만리포 한 이장님이 ‘바다가 죽으니 바다에 기댄 모든 사람과 생명이 죽었다’고 말한 것이 기억난다”며 “서해안 사태는 한국 교회가 생태적 회심의 기회를 갖도록 했다. 내년부터 이곳에서 창조신앙을 가칠 것”이라고 포부를 밝혔다.

의항교회 이광희 목사는 “이제 태안은 눈으로 기름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깨끗해졌다”고 말했다. 이 목사는 “하지만 아직도 눈에 보이지 않는 피해의 흔적들이 자연 속에 남아 있고 사람들 마음속에 남아있다”고 말했다.

4년 만에 다시 태안을 찾은 이금구 목사(사랑의교회 이웃사랑선교부)는 “그때의 기억이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감회가 새롭다”며 “기념비와 전시관을 통해 역사적인 교훈이 계속 이어지길 바란다”고 말했다. 아들과 함께 온 박대인 집사(39)는 “아이들이 바다를 무척 좋아해서 함께 왔다”며 “한국 교회가 보여준 봉사도 신앙의 한 부분이다. 아이들에게 이 섬김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기념비 제막식과 개관식이 끝날 때까지도 강 씨는 수리한 통발을 옮기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한보따리 수리한 통발을 이고 바닷가에 정박된 배로 터벅터벅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그 뒷모습 왼편에는 4년 된 굴 껍질 더미가 굴양식을 위한 채묘를 기다리고 있었다. 굴양식을 포기했다던 강 씨는 미련이 남았는지 한 번씩 굴 껍질 더미에 눈길을 줬다. 자연환경은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지만 사람들의 마음은 4년 전 그 자리에 아직 머물러 있었다. 먼지가 수북하게 쌓인 굴 껍질 더미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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