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하나님의 경호원으로 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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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하나님의 경호원으로 살겠습니다”
  • 이석훈 기자
  • 승인 2011.04.20 17:4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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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법인 명희의료재단 이사장 김 규 현 장로

전 대통령 경호원에서 하나님 전하는 전도자로의 삶 고백
충북기독병원·닛시복지마을 통해 환자들에게 안식처 제공


▲ 경호원은 대통령의 그림자인 것처럼 남은 여생을 하나님과 동행하겠다.
▲ 대통령의 말은 이유를 묻지 않고 순종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무조건 순종한다.
▲ 대통령을 위해서라면 총알받이를 해야 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일이라면 몸을 바쳐 헌신한다.

의료법인 명희의료재단 이사장 김규현 장로(아름다운교회·사진)가 대통령을 경호하던 경호원에서 이제는 ‘하나님의 경호원’임을 자청하고 나섰다.

김규현 장로는 알코올중독과 정신질환 전문기관인 충북기독병원을 확장해 닛시복지마을과 함께 그 사역의 폭을 넓혀가고 있다.

16년째 이 사역을 펼치고 있는 김 장로는 정신질환이나 알코올중독 때문에 가족들에게 버림받아 어려운 사람들이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재활, 치료 사역을 통해 누구보다 그들의 아픔을 이해하고 있다.

청와대 대통령 경호원을 거쳐 1급 관광호텔 경영자에 이르렀지만, 한순간의 방심으로 모든 것을 잃는 아픔까지 경험했다. 원치 않게 오랜 기간을 구치소에 지내게 되면서 인생의 전환기를 맞게 된 것이다.

“보통사람들은 흔히 청와대 경호원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 청와대 건물을 지키는 경호원과 대통령 한 분을 지키는 대통령 경호원은 조금 다른 개념입니다. 저는 1974년 박정희 전 대통령을 경호하면서 경호원 생활을 시작해 최규하, 전두환 전 대통령의 임기 초기까지 경호원으로 대통령을 가장 가까이서 8년간 모셨습니다.”

충성심 하나로 유사시에는 대통령을 위해 죽음까지 각오해야 하는 경호원 생활을 8년으로 마감하고 새로 시작한 것은 1급 관광호텔 경영자. 그야말로 내려올 줄 모른채 인생의 오르막만 살았던 셈이다.

김 장로가 태어난 곳은 경상남도 김해 진영. 지금은 차로 달리면 부산에 엎어지면 코 닿을 곳이지만 그때만 해도 시골 중의 시골이었다.

“어린 시절, 할머니는 주일이 되면 새벽부터 일어나 곱게 단장하시고 저를 앞세우고 교회로 가셨습니다. 30리 길을 꼬박 걸어 교회를 갔다 오면 친구들과 노는 것은 포기해야만 했죠. 가끔 친구들과 놀고 싶어 ‘할매, 오늘만 안 가면 안 되나?’하고 물어보면 어김없이 ‘예수님이 기다리시니까 안되제’하며 구수한 사투리로 말씀하셨던 게 아직도 생생합니다. 또 오일장이면 가마니를 짜서 판 돈 1원짜리 지폐를 뜨거운 솥뚜껑에 다려서 주일마다 헌금으로 내던 할머니의 정성은 신앙생활이 이런 것이로구나 하는 생각을 갖게 했습니다.”

그가 어린 시절 다니던 진영교회는 120년의 역사를 자랑한다. 그의 증조모가 처음 신앙을 가지고 자신의 며느리들을 전도해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한 것이 계속 이어져 그의 어머니와 김 장로, 그리고 지금은 그의 손자들까지 이어져 6대째 신앙을 지켜오고 있다.

언제나 신앙이 제일 우선이었던 할머니와 어머니의 영향으로 그 역시 지금껏 모든 일에는 예수님 제일이라는 가치관이 깊이 뿌리박혀 있다.

유도로 명성을 떨치던 부산 동아대학교에서 유도선수 생활을 시작해, 군 입대 후에도 선수생활을 계속했다. 덕분에 대학을 졸업했을 때는 교사자격증을 받아 대구 영남고등학교에서 교직 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다. 그러던 중 당시 육영수 여사 저격사건이 일어나고 청와대 경호원을 보강하면서 그는 유도특기자 자격으로 대통령 경호실에 들어가게 됐다.

대통령이 가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가야만 하고, 명령과 복종이 생명인 경호원 생활, 그것은 곧 신앙생활을 지속하기 어렵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께서는 골프를 많이 즐기신 편이었습니다. 주일에는 반드시 골프를 치러나가셨는데 저도 항상 수행해야 했기 때문에 주일 성수를 하기가 무척 어려웠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주일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할머니로부터 배웠는데 주일을 지키지 못하니 얼마나 마음이 괴로웠는지 모릅니다. 멀리서 교회 종소리가 ‘댕그렁 댕그렁’ 하고 들리면 ‘예수님이 나를 부르시는구나’하는 생각도 했었습니다. 그래서 골프장 소나무 밑에 서서 잠깐 ‘하나님, 교회 가게 해주세요’하고 기도했던 기억이 납니다.”

소나무를 붙들고 교회 가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모습을 우연히 목격한 박 대통령은 그를 보고 “경호원, 어디 아픈가?” 물었고, 그때 “아닙니다. 이 나라와 민족, 대통령을 위해 기도하고 있었습니다”라는 그의 말을 들은 대통령의 배려덕문에 경호실에 예배당을 만들 기회를 얻었다.

8년 간의 대통령 경호원 시절을 끝내고 신앙적으로는 명성교회를 통해 하나님을 섬기고, 사회적으로는 1급 관광호텔을 경영하는 경영자로서 승승장구를 이루던 그에게 1998년 IMF라는 시련이 시작됐다.

“겉으로 보기에 저의 삶은 어느 것 하나 흠잡을 것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항상 하나님을 맨 앞에 세우고 모든 일을 해나갔고, 신앙적이지 않은 것에는 돌아보지도 않았으니까요. 제가 경영하던 호텔도 로비에서 항상 설교방송을 틀고 찬송이 흘러나오도록 할 정도로 하나님 앞에서 깨끗하고 자 노력했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IMF로 인해 부도라는 큰 시련을 맞았다. 사실 사업하는 사람치고 부도 한번 맞지 않으면서 사업하는 게 아니라는 말도 심심찮게 하지만 부도라는 상황은 그가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다.

“당시는 특급호텔을 빼놓고 많은 호텔이 부도를 맞던 상황이었습니다. 6개월 동안 유예기간을 줄 테니 어음과 수표들을 모두 회수하라는 권유를 받았지만 ‘하나님이 주시는 시련이니 뜻이 있겠지’하는 생각으로 모든 것을 정리하고 받아들였습니다.”

그렇게 인생의 정점에서 밑바닥까지 떨어진 김 집사는 영등포 구치소의 찬 마룻바닥에서 다시 하나님과 만나게 된다.

“처음 구치소에 들어가 있으니 주기도문도 안 외워지더라고요. 한마디로 불평이 가득 찼죠. ‘왜 나입니까’ ‘내가 뭘 잘못했습니까’라며 3개월 동안 하나님 앞에서 불평만 쏟아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성경을 펴는데 회개하지 않으면 촛대를 옮기겠다는 성경 구절이 딱 나오는데 제 마음에 ‘아, 이건 내가 잘 못한거구나’하는 생각이 퍼뜩 떠오르더군요.”

완전하게 희망과 소망이 사라졌을 때 회개가 시작되는 것일까. 모든 재산을 날리고 빈털터리가 됐던 그는 가슴 저 밑에서 끓어오르는 회개를 시작하게 됐다.

“신앙생활 하는 동안 항상 행위에 자신 있었던 저에게 하나님은 조건없는 순종을 말씀하셨습니다. 항상 사업하면서 ‘하나님 이것만 해결해주시면 제가 이걸 하겠습니다’ 하는 조건을 걸었던 것입니다. 그것부터 회개가 되는데 처음에는 잘못한 것이 하나도 없다고 버티던 제가 80개나 되는 죄를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서 다시 철저하게 낮아진 그에게 성령이 역사했다. 태어나서 그렇게 울어본 적이 없다는 김 장로는 3일 밤낮 동안 그야말로 피눈물을 쏟아냈다. 그리고 다시 시작해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제 인생을 돌아보니 무엇 때문에 돈을 벌었나 하는 회의가 들더군요. 성경에서는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을 끝없이 하시는데 헌신한 기억은 있지만, 사랑을 실천한 기억은 없더군요. 그래서 ‘하나님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시면 이웃을 사랑하는데 모든 것을 바치겠습니다’하고 서원했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제2의 인생. 닛시복지마을이라는 기도원을 만들고 3명의 알코올중독자들을 데리고 공동체를 시작했으며, 2007년 1월 알코올중독, 정신지체, 장애인들을 보호하고 치료하는 베데스다 병원을 개원했다.

이번에 병원규모를 240병상 규모로 증축해 이름도 ‘충북기독병원’으로 새롭게 바꾸었으며, 닛시복지마을의 사역도 더욱 확대해 나갈 계획이다.

충북기독병원은 정신질환 전문기관임에도 모든 공간을 오픈시켰으며, 인테리어 역시 밝고 환한 분위기로 만들었다. 외벽을 투명유리로 만들어 이곳이 정신병원인지 호텔인지 구분이 안 되도록 만들었다.

김규현 장로는 병원과 복지마을이 위치한 충북 괴산의 수십만 평 골짜기를 하나님이 주신 작은 천국으로 만든다는 각오로 기도하고 있다. 닛시복지마을은 일반 복지가 아니라 어느 정도 정신질환 치료가 됐거나 경미한 환자들을 위한 공간으로 준비하고 있다.

즉, 사회나 집으로 바로 보내는 것이 아니라 이곳에서 사회적응 능력을 길러주는 역할을 하기 위함이다. 때문에 5~10년이 걸려야 하는 적응기간을 이곳을 통해 최소화 한다는 것이다. 또한, 신앙생활을 통해 안정을 찾고 가정을 만들어 주는 일과 정착 기반까지 만들어 주려는 것이 복지마을의 궁극적인 목표이기도 하다.

“사회에서는 버림받았다고 여길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이들을 더 사랑하신다고 믿기에 그들과 함께 뒹굴며 생활하고 있는 것입니다. 정신과로는 드물게 맞춤형 의료서비스를 제공함으로써 규모나 운영에서도 자부심을 갖고 있습니다.”

하나님 때문에 다시 시작한 인생임을 강조하는 김규현 장로는 2008년 2월 신앙이야기를 담은 ‘나는 이제 하나님의 경호원입니다’(쿰란출판사)를 출간해 베스트셀러에 올랐으며, 철저한 보수신앙을 바탕으로 200 여 곳을 다니며 신앙간증을 하고 있다.

책을 통한 수입금과 복지마을 후원회를 통해 들어온 수익금을 선교회 후원금으로 하여 형편이 어려운 환자들에게 지원하고 있다. 때문에 제일 먼저 승용차를 이용하던 그가 10여 년 전 부터는 기름값을 아껴 선교비에 사용하기 위해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자녀들을 축복하셔서 두 아들과 딸이 병원과 닛시복지마을에서 원장인 아내 이명희 목사와 함께 섬기고 있다. 김 장로는 자녀들에게 물질의 십일조 뿐만 아니라 ‘인생의 십일조’를 바치라고 강조하고 있다. 그것이 바로 자신이 지금 유일하게 후회되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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