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코 작지 않은 작은 섬…산달교회 전도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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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코 작지 않은 작은 섬…산달교회 전도기행
  • 최창민 기자
  • 승인 2011.04.07 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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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 목사와 서영선 사모의 좌충우돌 섬 목회 이야기

경남 거제도 근처에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작은 섬 하나가 있다. 산달섬 법동마을. 모든 섬이 그렇듯 이곳도 외지다. 가까운 거제도 사람들조차 이 섬을 아는 이가 흔치 않다. 간간히 이 섬의 진한 매력을 아는 사람 몇몇이 입소문을 냈고, 이 소문을 훔친 억세게 운 좋은 사람 한둘이 뱃삯을 아깝지 않게 여기면서 흥취를 만끽하고 돌아간다.

# 산달섬과의 첫 만남 

이만 목사(44세)와 서영선 사모가 이 섬에 들어온 것은 지난 2007년 1월 1일이다. 인생의 후반전에 뒤늦게 신학을 하고 목사가 된 그가 40여 년 전에 세워진 작은 섬 작은 교회인 산달교회에 부임했기 때문이다.

이런 외진 섬에 삯을 받고 이삿짐을 옮겨줄 사람은 당연히 없다. 좁은 길을 따라 쇠파이프 난간을 붙잡고 언덕배기에 올라서야 도착할 수 있는 교회 사택으로 일일이 이삿짐을 날라야 했다. 큰 도시에서는 겪어보지 못했던 어려움과 처음 만나는 순간이었다. 동트기 전 시작해 해넘이까지 보고서야 일을 마칠 수 있었다.

한겨울 손을 비벼가며 짐을 나르고 난 후, 보일러에 기름이 떨어졌다는 사실이 눈에 들어왔다. 섬에 살면 한가로이 쉬엄쉬엄 살겠거니 생각했다면 오산. 겨우내 엄동설한에 얼어 죽지 않으려면 기름이 닳지 않도록 부지런히 손수레로 한 드럼통씩 싣고 와야 했다. 보일러에 기름이 가득 들어찬 것을 확인한 후에야 마음이 놓였다. 이만 목사가 외진 섬 산달교회와 만난 첫 풍경이다.

“산달교회 성도님들은 보통 80세 이상입니다. 조그마한 작은 길 옆에 쇠파이프로 만든 난간에 의지해 수십 년을 오르내리면서 교회를 다니셨죠.”

이만 목사는 “젊은 사람들은 진즉 뭍으로 떠났다”고 말했다. 그가 이 섬에 왔을 때는 이미 젊은 사람들이 없었다. 혹 이 섬에서 태어났어도 세상 구경을 하고나면 섬 생활이 지긋지긋하게 느껴질 수도 있었을 터. 고요하고 적막한 이 섬에서도 젊은이라면 때로는 무모한 도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목사에게 있어 교회와 목회지에 젊은이가 없다는 것은 참 아쉽고 서러운 일이다.

섬사람들은 참 바지런하다. 새벽부터 일어나 바다에서 굴을 따기 시작한다. 해가 질 때 쯤 집에 들어와 식사를 하고 잠을 잔다. 참 평범하고 지루해 보이는 일상이다. 그러나 이 섬 생활을 그리워하는 이들도 있다. 이만 목사는 “지금 한창 공사 중인데 섬과 육지를 잇는 다리를 놓고 있다. 다리가 생기면 고향으로 돌아와 살고 싶어 하는 사람들도 있다”며 함박웃음을 지어보였다. 

# 작은자, 목회자가 되다

작은 섬을 목회지로 삼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이만 목사는 도시 큰 교회 목사들처럼 거창한 비전이나 입으로 술술 풀어낼 수 있는 목회철학 같은 것은 없다. 그저 ‘주님 안에서 될 대로 되라’다.

마태복음 4장 19절과 20절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저희가 곧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순종하는 것이 그의 목회철학이자 비전인 것이다. 다소 맥없이 느껴질지 모르지만 생각해보면 이보다 이상적인 목회철학은 존재할 수 없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목사가 주님의 뜻대로 사는 것 이상을 바라는 것이 최고의 순종이 아니던가. 각종 미사여구를 붙여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그 어떤 목회철학보다도 감동적으로 들렸다.

이만 목사는 자칭 ‘노아의 후예’라고 말한다. 그의 부친이 나무배를 만드는 조선소를 운영했기 때문이다. 그는 늘 집 앞에서 나무냄새를 맡으며 자랐다. 그래서인지 그의 형제 다섯은 모두 나무를 좋아했다고 한다.

1996년 5월 18일 이만 목사는 동갑내기 서영선 사모와 결혼했다. 그리고 13년이 지난 2009년 2월 24일 하나님이 이들 부부에게 귀한 딸을 주셨다. 목회를 위해 섬에 들어온 지 2년만의 일이다. 이들 부부는 뒤늦게 딸을 가지면서 사람의 지혜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하나님의 섭리를 알게 됐다고 고백했다.

“아브라함의 심정, 사라의 심정을 조금은 알 것 같았습니다. 믿음으로 살도록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할 따름입니다. 온갖 귀여움과 애교를 부리는 우리 딸 유니를 보면 지난 힘겨웠던 시간들이 전부 감사로 변합니다.” 이만 목사가 뒤늦게 목회를 시작한 동기는 그의 표현에 의하면 ‘기적’이다.

“저에게 있어서 목회는 재능으로 보나 인품으로 보나 모든 면에서 자격 미달이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습니다.”

대기업을 다니면서 남부럽지 않은 직장생활을 하고 단란한 가정을 꿈꾸던 그의 삶에 어느 날 시련이 닥쳐왔다. 결혼 2년 만인 1998년에 거제 조선소에서 일을 하다가 온몸의 30%에 전신 3도 화상을 입은 것이다.

“아내는 제가 목회자가 되어야 할 사람이라고 항상 이야기했지만, 저는 꿈도 꾸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병원에 입원해 있을 동안에 목부터 등까지 입은 상처를 보면서 정상적인 생활은 어렵다는 것을 차츰 깨닫게 됐습니다.”

이때부터 목회에 대한 마음이 생겼다. 정확히 말하면 그가 군대에 있을 때부터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었지만, 지금까지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아내에게 “몸이 어느 정도 치료가 되면 1톤 트럭으로 잡화상을 하면서 전국을 돌아다니고 싶다”고 말했다. 마음을 비우고 긍정적으로 무엇이든 시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신학을 시작했다.

# 섬 전체 복음화의 꿈

산달섬은 농한기가 따로 없다. 겨울에는 굴을 따고 밭에 심어놓은 유자도 딴다. 올해는 굴 값이 많이 올라 섬 사람들이 즐거워한다. 사람들이 바쁘고 분주하다고 해서 복음이 필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누구에게나 가까운 이웃부터 복음을 전해야 한다.

‘예수님이 당신을 위해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 마을 사람 40여 명 중 절반 가량이 교회에 출석하고 있다. 지난 2년 간 7명을 전도했다. 이만 목사는 “애써 전도한 사람들이 뭍으로 나가면 슬픈 마음을 달랠 방법이 없다”고 하소연했다. 누구보다 열심히 전도하지만 섬 전체로 200명 남짓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어서 쉽지만은 않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에게 지혜를 주셨다. 폐교된 학교의 공간을 이용해서 ‘갈릴리 비전학교’를 운영할 계획이다. 학교 주변에 있는 농가의 생태환경을 복원하고 토요일과 주일에 성경학교를 열면서 섬마을 사람들의 마음을 사는 것이다.

특히 교회의 장점을 활용해 뭍사람들을 섬으로 불러 지역경제에 이바지한다면 섬사람들도 교회의 역할을 인정하게 될 것이라는 계산이다. 전국 어느 지역보다 밤과 바다 경치가 아름다운 산달섬. 매일 새로운 풍경이 펼쳐지는 이곳에 사람의 발길이 닿을 수 있도록 교회 수련회와 국내 단기선교 등의 프로그램을 운영할 계획이다.

또 장기적으로 선교복지관을 건립해 낙후된 지역민들의 복지 향상에도 기여할 생각이다.

“40여 년 전 세워진 산달교회는 모진 세월 속에서도 지금까지 복음의 깃발을 들고 오늘도 서있습니다. 이 깃발을 제가 이어받아 섬 전체를 복음화 시키는 꿈을 꾸고 있습니다.” 작은 섬 교회이지만 세계 선교를 위해서도 기도하고 준비할 작정이다. 작다고 해서 큰 꿈을 꾸지 말라는 법은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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