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입을 닫고 마음을 열다
상태바
교회, 입을 닫고 마음을 열다
  • 공종은 기자
  • 승인 2010.12.15 14:3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2010, 성탄을 맞는 교회의 풍경

뇌병변 장애우들과 함께하는 성탄 진행
쪽방촌-소년소녀 가장에게 전해지는 연탄

‘성탄’. 이 단어만 들으면 언제나 마음이 달뜬다. 마음속에 품은 연인을 사모하는 듯, 성탄이라는 단어는 한달 여 전부터 사람들의 마음이 설레게 한다. 12월. 찬바람이 몰아치면서 우리들의 몸은 점점 중무장 상태로 변해가지만, 마음은 어느 순간 무장해제를 당하게 된다.

‘예수’ 때문이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오셨다’는 그 사실은 내가 서 있는 이 자리를 넘어 옆에 있는 친구에게 그리고 한 발 떨어진 낯모르는 사람에게도 전해지고, 국경을 넘어 지구 반대편에 있는 이름 모를 사람에게도 어김없이 전해진다. 그 사랑의 빛 아래 우리 모두가 서있는 것이다.

성탄은 이렇듯 우리를 설레게 하고 닫힌 마음을 열어젖히는 강한 중독성을 가졌다. 그것이 바로 사랑이다. 예수라는 이름의 사랑이다. 하지만 교회, 너무 많은 욕을 먹는다. 귀를 닫아도, 부인하려 해도 교회를 향한 고약한 소리는 어디선가 계속 들리고 끝없이 이어진다. “도대체 교회가 뭘 잘 못 했길래 이러는 거야?” 라며 항변이라도 하면 “뭘 잘못했는지 정말 모른다는 거야?”라는 힐책이 금방 되돌아온다.

“교회가 이제 입을 닫고 마음을 열어야 해요. 마음이 닫히고 입이 열리면 그것은 성탄이 아니죠. 여타 다른 종교와 다를 바가 하나 없어요. 한 번의 마음이 천 마디의 말보다 더 큰 사랑을 전하기 때문이에요.”
사금파리 조각이 스쳐가듯 날카롭게 상처를 낸다. 깨달음의 상처. 왜 지금껏 이런 말에 귀 기울이지 못했던가..... 후회가 밀려온다. 아니 후회보다는 부끄럽다는 표현이 더 정직하겠다. “입을 닫고 마음을 열어야 해요.”

입을 닫은 교회, 하지만 마음을 연 교회. 어디 없을까. 숨 한번 크게 쉬면, 눈을 조금만 낮추면 찾을 수 있을까. 2010년 성탄을 맞는 교회들의 풍경을 들여다보자.

#‘뇌병변 장애우’들과 함께하는 성탄 풍경
사람들의 도움 없이는 좀처럼 움직이기 힘든 ‘뇌병변 장애우’. 행동은 물론 말조차 제대로 하기 힘든 이들. 이들의 몸짓을 보고 있으면 어느새 가슴이 먹먹해진다. 이들의 말은 몸짓이 되고 몸짓은 말이 된다. 한마디 하는데 1초도 걸리지 않는 말, 이들은 말을 몸으로 한다. 더듬거리는 몸짓이 1분, 심지어 10분이 걸리기도 한다.

이들에게는 옆에 사람이 있는 것만으로도 도움이 된다. 남의 도움 없이는 한걸음도 움직이지 못하는 전동 휠체어가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다. 그래서 이들을 보듬기 위해 한 교단이 나섰다. 기독교대한감리회. 내부의 상처가 아직 아물지 않았지만 성탄의 기쁨을 나누기 위한 따뜻한 마음은 식지 않았다.

올해 성탄절을 ‘뇌병변 장애우’들과 함께하는 성탄으로 보낸다. 그리고 내년 한 해, 교단에 속한 모든 교회들이 이들의 손을 따뜻하게 잡아주기로 했다. 뇌병변 장애우들은 일반 장애우들 중에서도 중증 장애를 가진 이들. 혼자서 활동하거나 생활하는 것이 불가능한 경우가 많다. 어느 누구보다 우리들의 손이, 교회의 손이 필요한 이들.

우선 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전동 휠체어를 전달한다. 몇 대 전해지는 전동 휠체어가 얼마나 도움이 될까 만은, 한 해 동안 마음으로 이들을 품고 기도하기로 했다. 이들은 성도들의 마음에 살아있고 그 사랑은 뜨겁게 용솟음치며 이들에게 전달될 것이다.

#쪽방촌 주민들과 함께하는 성탄 나눔
3천 5백. 적지 않은 이 규모는 서울시에 있는 ‘쪽방’의 숫자다. 서울시 자활지원과가 밝힌 데 따르면 여기에 3천 2백여 명이 거주하고 있다. 과연 이 쪽방에는 어떤 사람들이 생활하고 있을까. 대부분 기초생활수급자들이다. 거기에 65세 이상의 독거노인들과 장애인들이 옹기종기 모여 산다. 이들의 눈을 들여다보면 삶의 절망감이 베어 나온다.

서울역 인근의 한 쪽방. “휴~~” 찬바람에 묻어나오는 한숨도 이제 말라버렸다. “나를 두고 떠나버린 자식들에 대한 원망도 나오지 않는다. 원망하면 뭐 하겠나. 그저 어느 하늘 아래서건 잘 살기를 바란다.” 몇 겹인지도 모르게 두텁게 껴입은 한 촌로가 담배 한 개비 빼물며 마른 한숨을 날린다.

“그나마 성탄 때가 되면 나은 편이야. 교회에서 찾아오잖아. 평소에도 드문드문 찾아오기는 하지만 그래도 성탄절이 제일 인심이 후한 것 같애. 그래서 기다려져.”

쪽방촌에 있는 사람들 대부분은 누군가로부터 그리고 어딘가로 부터 버림받은 사람들.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가 이들의 시린 손을 잡는다. 예수 탄생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23일, 이들을 찾아가 아픈 마음을 어루만진다. 몇 겹의 내의를 껴입고도 오들거릴 수밖에 없는 쪽방에 따뜻한 온기를 불어넣고 하얀 김 모락 피어나는 따뜻한 밥 한 공기 대접한다.

쪽방촌 사람들에게 무엇을 주면 좋을까. 무엇보다 예수의 마음이리라. 예수의 마음이 곧 사랑, 겨울을 날 수 있는 사랑의 마음을 전달하기로 했다. 찬바람을 막아줄 모포, 쉴 새 없이 결리는 허리를 뜨끈하게 지져줄 찜질핫팩, 시린 발 녹여줄 수면양말, 언제고 사용할 수 있는 부탄가스. 이런 물품들에 사랑을 담아 전달한다.

“이들이 소망을 찾았으면 좋겠습니다. 사회로부터 버림받아 삶의 기반이 무너지고 절망에 빠진 이들의 절망감이 소망으로 바뀌어지는 게 이번 성탄의 바람이에요.” 그래서 서울역 쪽방촌 사람들을 돕는 단체의 이름이 ‘소망을 찾는 이’다. 이들 모두가 소망을 찾기를 바라는 마음이 소복이 담겼다.

#까만 연탄에 피어나는 하얀 사랑
연탄. 그 까맣던 몸이 하얗게 타기까지 내 몸을 내놓는 것이 예수의 사랑을 닮았다. 아낌없이 주고도 그 재마저 내어주는 연탄. 불과 십여 년 전만 해도 ‘가난의 상징’으로 낙인찍혔던 연탄. 그 때문인지 점차 도시에서는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그랬던 연탄이 어느 샌가 다시 얼굴을 내밀었다. 서울의 어느 달동네, 아니 도시의 후미진 곳엔 아직도 그 까만 연탄이 일년 내내 수북이 쌓인다.

경기도 양주에 있는 지행교회. 매년 지역주민들에게 이 연탄을 나누어준다. 연탄 한 장이 귀한 이웃을 위해 연탄을 나눈 지가 벌써 7년째, 처음 5천 장으로 시작했던 나눔이 올해는 1만 7천 장으로 늘었다.

사랑은 나눌수록 커진다던가. 정말 커졌다. 씀씀이도 헤퍼졌다. 막 퍼주고 싶다. 퍼주고도 더 주고 싶다. 하지만 그 어느 누구 한 사람 이 헤픈 씀씀이를 꾸지람하는 사람이 없다. “당연한 일 아닌가요?”

‘당연한 일’, 그랬다. 나눔을 실천하는 사람들에게 헤픈 씀씀이는 당연한 일이었다. 이게 내 집에 들이는 연탄이었다면 힘들었으리라. 하지만 남의 집에 넣어주는 연탄인데도 신이 난다. 오히려 연탄을 나르면 나를수록 더 힘이 난다. 옷이 새까매지고 그 곱던 얼굴에 숯검정이 묻어나도 즐겁기만 하다. 바로 나눔이 있기 때문이다. 마음이 열리기 때문이다.
 
닫힌 지갑이 열리고 나눔과 베풂의 실천되면 좋겠다. 예수께서 당신의 살과 피를 주신 것처럼 내 것의 경계선이 허물어지고 온 세상이 담 없는 한 마을이 됐으면 좋겠다.

사랑을 나누는 사람들의 웃음은 건강하다. 그리고 사랑을 실천하는 교회는 입을 닫고 마음을 연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