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은 더 이상 우리를 기억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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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은 더 이상 우리를 기억하지 않는다"
  • 승인 2002.06.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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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사람은 북파공작원을 자청했다. 보상도 보상이었지만 젊은혈기에 나라를 위해 무언가를 하고 싶었다. 그래서 목숨을 바치기로 했다. 월남전쟁이 한창이던 때 군목부중이던 한사람은 월남파병을 자청했고 머난먼 이국땅에서 생사를 넘나들며 나라를 위해 투신했다.
그러나 수십년이 지난 지금 사람들도 조국도 그들을 더 이상 기억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은 나라를 원망하지 않았다. 젊은날 자신들의 헌신을 역사는 기억할 것이라며 씁쓸한 웃음만 지을뿐. 이제 그들은 신앙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더이상 힘들지도 외롭지도 않다.
그리고 다시 나라사랑을 시작했다. 이제는 나라사랑을 위해 더이상 무기를 들지 않아도 된다. 무릎꿇고 두손을 모으며 조국의 안녕과 통일을 위해 끊임없이 기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편집자 주>

조국에 충성했건만…
1966년 겨울. 얼음장같은 바람이 몰아치는 청계산자락. 젊은이들이 하나씩 둘씩 모여들기 시작한다. 외모는 각각이었지만 꼭 다문 입술에서 비장한 각오를 엿볼 수 있었다. HID, AIU로 지칭되는 육군첩보부대. 이 많은 젊은이들은 바로 북파공작원을 자원하여 입대한 것이다.
그들속에 문석곤씨(의정부광은교회·54)가 있었다. 20년이 넘게 군생활을 했던 문씨의 시작은 바로 북파공작원이었다.
문석곤씨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AIU에 투신했다. 흔이 ‘물색조’로 지칭되는 사람들의 의해 첩보부대 입대를 제안받았고 연금, 성과급 등과 정상적인 사회원으로의 복귀를 약속한 조국의 거짓에 속았던 것이다.

문씨와 같은 생각을 한 많은 젊은이들이 북파공작원의 투신으로 미래의 보장을 기대했다. ‘조국은 내손으로 지킨다’는 명예욕과 생사를 넘나드는 상황을 담보로 얻는 경제적 이득이 많은 젊은이들을 유혹했던 것이다. 그러나 아무도 몰랐다. 조국이 그들을 배신할 것이라는 것을.
문씨가 주위를 둘러보니 대부분이 20대초반이었다. 군인기본훈련을 받은 이들은 강원도 속초에서 북한침투지역과 흡사한 모형을 만들어 산악훈련, 생식법, 폭파, 독도법 등의 특수훈련을 받으면서 점차 인간병기가 되고 있었다. 훈련은 너무나 힘들었다.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두메산골에서 개구리와 뱀을 잡아먹으며 생명을 연장해야 했고 끊임없이 산악행군을 하며 언제 있을지 모를 북파에 대한 준비를 했다.

드디어 나라의 부름을 받았다. 당시 ‘대남공작원 김신조와 울산 무장공비 침투사건’으로 한껏 긴장된 정부는 2년동안의 훈련으로 단련된 이들을 북한에 역침투시켰다. 북한군의 동태파악과 군대배치 상황 파악이 주목적이었다. 훈련을 받으면서 담담했던 마음이 조국을 위해 이 한목숨 바치겠다는 각오로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김신조사건 등의 북한만행이 젊은피를 더욱 자극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게 불타오르는 애국심으로 시작한 북파공작원생활속에서 문씨는 많은 것을 잃어야만 했다. 동고동락했던 전우가 배신해 월북하는가 하면 임무수행중 전사한 전우를 뒤로하고 남으로 향해야만 했다. 작전도중 소리도 없이 행방불명되는 전우도 부지기수였다.
북녘에서 전사한 전우들은 일급비밀이라는 이유로 상황보고만이 유일한 수단이며 그들에 대한 보상에 대해서는 당시로서는 알 길이 없었다. 훗날 모 사찰에 위패를 모아 해마다 위령제를 지낸다고는 하지만 그들의 희생에 비해서 너무도 미약한 대우였다.

그렇게 5년동안 힘든 인생을 살았던 그는 임무를 마치고 장기복무 신청을 했다. 입대당시 약속했던 많은 대가들을 기대할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무턱대고 사회로 나갈 엄두도 안났지만 그래도 언젠가는 조국이 자신의 헌신을 인정할 것이라는 미련을 버릴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15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지만 그의 희생은 누구도 거론하지도 기억하지도 않았다.

그를 지켜준 하나님
첩보부대에 입대전까지만해도 그는 주일마다 교회를 다녔다. 어렸을적부터 할아버지 손을 잡고 교회를 다니며 학창시절 신앙안에서 성장했다.
그러나 입대와 동시에 교회는 멀어질 수 밖에 없었다. 흔히 말하는 군대의 ‘종교행사’ 자체도 원천봉쇄됐기 때문이다. 할 수 없었다.
처음에는 마음속으로 기도를하며 신앙을 다독거렸지만 힘든 훈련속에서 하나님은 멀어지고 있었다. 그러기를 5년. 그에게 있어서 신앙은 요원한 일이 돼버렸다. 장기복무를 신청하면서 신앙의 자유가 주어졌지만 그의 신앙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래도 위안을 삼을 수 있었던 것은 아무도 생각은 없었지만 주일에 교회는 갔다는 것이다.

그는 첩보부대에서의 힘든생활을 포함해 월남전, 직업군인으로 그의 복무기간은 20년이 넘는다. 젊은날의 전부를 조국에 헌신했다. 그러나 그는 일정액의 퇴직금 만을 손에 쥐고 사회로 던져졌다. 상명하복의 질서속에 인생의 3분의 1일을 군에서보낸 그에게 사회는 너무도 야박했다.
늘 힘들었고 외로웠다. 가끔 자신을 원망하기도 했다. ‘군대가 아닌 사회속에서 다른 일을 내가 그토록 열심히 했었다면 지금같은 아픔은 겪지 않아도 됐을텐데…’많은 시행착오를 거쳤다. 북한을 넘나들정도로 악바리였던 그였지만 이미 하루살이도 버거울 정도로 연약해졌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문석곤씨에게 손을 내민 것은 조국도 친구도 가족도 아니었다. 문석곤씨를 지탱시켜 주었던 것은 신앙이었다.
그는 상처받은 마음과 지친 몸을 이끌고 새벽기도를 나가기 시작했다. 새벽기도를 나가면서 그는 새로운 가능성들을 찾을 수 있었다. 조국에 대한 아쉬움과 한탄으로 힘든 인생을 자청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생처음 기도원에도 올라가고 금식하며 온전한 신앙인으로 거듭나는데 혼신을 다했다. 버겨운 삶의 굴레를 훌훌 털어버리고 다시 사회속으로 뛰어들었다. 용기와 자신감을 갖고. 그리고 안타까운 심정을 기도로 다독거렸다. 힘들고 어려웠던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지만 이내 용서의 마음이 퍼져나갔다.

그리고 서운했던 조국을 위해 ‘이제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져 믿음으로 조국의 평화와 통일이 이루어게 해달라’고 머리숙여 기도한다. 그리고 오늘도 자신에게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한다. 조국이 무엇을 해줄 것인가 생각하기 전에 자신 스스로 삶을 개척하는 생존방식을 터득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용솟음치는 마음은 결코 잊지 않는다.
“조국이여. 이전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국가를 위해 생명을 내어놓은 사람들의 헌신을 헛되이 여기지 말아야 한다”

김광오기자(kimko@uc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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