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권침탈의 고난 속에서 교회는 더 강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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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권침탈의 고난 속에서 교회는 더 강해졌다
  • 이현주 기자
  • 승인 2010.08.11 1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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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일병합 100년과 한국 교회의 수난

▲ 1910년 8월 22일 순종은 일본과의 병합을 인정했고 이어 29일 한일합방 조약이 발표됐다. 치욕의 역사가 시작된 순간이었다.

1910년 8월 29일 한일병합 조약 발효로 조선 역사 마감
식민지배 후 일제의 표적 ‘기독교’로 선회하며 강한 탄압
고난의 신앙 바탕으로 통일과 타국 식민 아픔 보듬어야

1910년 8월 22일. 창덕궁에서 열린 어전회의에서 순종은 각부 대신과 황족 대표들 앞에서 이렇게 말을 꺼냈다.

“짐이 동양 평화를 공고히 하기 위해 한일 양국의 친밀한 관계로 피차에 통합하여 한 집으로 만드는 것은 상호 만세의 행복을 도모하는 까닭임을 생각하였다. 이에 한국 통치를 들어서 이를 짐이 극히 신뢰하는 대일본국 황제 폐하에게 양여하기로 결정하고 이어서 필요한 조장을 규정하여 장래 우리 황실의 영구 안녕과 생민의 복리를 보장하기 위하여 내각총리대신 이완용에게 전권위임을 임명하고 대일본제국 통감 사내정의와 회동하여 상의해서 협정하게 하는 것이니 제신 또한 짐의 결단을 체득하여 봉행하라.”

왕의 명령은 거창하나 이 말은 결국 일본에 한국의 통치를 맡긴다는 치욕스러운 내용이었다. 이후 친일 총리 이완용은 일본제국 데라우치 통감과 공동 서명한 한일합방 조약을 발표한다. 조약은 한국이 일본에 병합된다는 구체적인 내용으로 한국 전부에 관한 모든 통치권을 일본에 위임했다. 조약은 29일부터 발효됐지만 사실상 법적으로 일본의 속국이 된 치욕스러운 날을 우리 역사는 8월 22일로 기억하고 있다. 조선이 건국 518년 만에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조선왕조 500년 역사에서 한국이 타국의 지배를 받은 적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일본과 병합은 이와 다른 것으로 역사학자들은 해석하고 있다. 한국인의 정체성을 완전히 말살하고 일본인으로 집단 개조를 추진했기 때문이다. 오직 일본의 이익을 위해 일하는 한국인만이 일제에게는 필요했던 것이다.

한일병합 100년의 때, 한국 교회는 어떠한 역사를 간직하고 있었을까. 기독교 역사는 한국 교회야말로 한일병합의 최초이자 최대의 피해자라고 기록하고 있다. 한일 병합 직후 일본은 국내의 애국인사를 한꺼번에 제거할 목적으로 대규모 항일 민족 탄압사건을 조작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흔히 ‘105인 사건’으로 기억하는 이 일은 국권상실 후 기독교가 겪은 최대의 수난이다. 교회는 일본에게 언제나 불편한 존재였다. 국제사회 여론을 주도할 선교사들을 배후에 두고 있으며 일본의 혹세무민 정책에도 잘 넘어오지 않는 이들이 바로 기독교인들이었다.

한일합방이 공포된 1910년 8월 29일, 일본의 긴장과 달리 거리는 조용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합방에 반대하는 조선인들의 시위를 걱정했지만 오히려 아무런 사건도 일어나지 않았다. 1905년부터 감지된 한일 합방 기운은 1907년을 기점으로 언론출판 활동의 제한과 ‘비도대토벌작전’ 등 항일인사 토벌로 강화됐으며, 한국 군대가 해산되는 등 무력한 상황이 계속되면서 합방이 일어난 직후에는 패배주의와 좌절감이 한국인들을 감싸고 말았다. 항일운동도 잠시 주춤하며 나라를 잃은 슬픔과 패배감에 휩싸여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일본은 언제고 다시 일어날 항일운동을 항시 대비했다. 특히 일찍이 해외로 나가 문명과 접촉한 지식인들 중에 기독교인들이 대거 포함되어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애초에 싹을 제거하기 위해 일본이 선택한 것은 ‘조작과 탄압’이었다.

105인 사건은 일본이 사전에 모의한 것으로 1910년 음력 8월부터 10월 사이 3회에 걸쳐 각 지역마다 총독 암살을 준비했으며 음력 11월 다시 이 계획을 진행하려고 했다는 ‘데라우찌총독모살미수사건’이 정식 명칭이다. 단, 이 사건에 연루되어 갖은 고문 끝에 제1심에서 유죄선고를 받은 사람이 105인에 달하기 때문에 통상 ‘105인 사건’으로 불렸다. 일본은 그 배후에 신민회가 있다고 단정하고 “야소교 신자들이 유력자였으며 야소교계 교사와 학생이 총독 암살 사건에 동참했다”고 날조했다.

실제 이 때 잡아들인 123명 중 108명이 개신교인으로 기독교가 표적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일제는 105인 사건으로 연루된 기독교인을 탄압한 것에 이어 합방 전후로 한국 교회가 추진하던 ‘100만인 구령운동’을 반일 구국운동이라고 몰아갔고 기독교계 학교의 교사와 학생, 교계 지도자를 대거 검거함으로써 기독교의 축소를 가져왔다.

그러나 한일병합으로 나라를 빼앗긴 설움은 민족의식을 더욱 곤고히 만들고 애국심을 강하게 키웠다. 교회가 겪은 탄압 역시 마찬가지였다. 기독교 역사학자들은 “한일 합방 이후 일어난 105인 사건으로 겪은 고통과 수난은 성숙한 신앙을 갖게 만들었고 기독교 신앙으로 악랄한 고문과 고통을 극복하며 강한 정신적 신앙유산을 물려주었다”고 평가했다.

105인 사건 연루자들이 겪은 고문과 고통은 상상을 초월한다. 당시 일본은 온갖 악랄한 방법을 동원하여 고문을 자행하고 강제 진술을 받아내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민족의 애환’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선우훈, 홍성린 등 몇 사람은 끝까지 이 일을 시인하지 않으며 고문에 저항했다. 그들은 참을 수 없는 고문이 가해질 때마다 “생을 저주하고 탄식하고 이를 갈면서 인간의 고통을 하나님을 향한 신앙심으로 극복했던 욥을 생각했다”고 증언했다.

105인 사건의 후유증에도 불구하고 기독교는 독립운동의 최전방에서 일본에 저항했으며 독립운동 단체들의 조직화 과정에서도 거의 모든 흐름에 기독교인들이 직간접적으로 관여했다. 고난 후 교회는 와해됨 없이 성장했고 3.1운동을 주도하며 한국의 자주 독립에 큰 흐름을 만들었다. 이것이 바로 교회의 힘이었다.

한일병합 100년. 한국 교회가 기억해야할 것이 바로 여기에 있다. 국가가 없이는 교회도 없다는 사실과 고난 속에서 더욱 강건한 믿음이 싹튼다는 사실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당시 교회가 겪은 고난은 다른 종교에 비할 수 없이 큰 것이었지만 고난을 이겨낸 믿음은 교회를 크게 부흥시키는 아주 탄탄한 밑거름으로 남게 된 것이다. 국권침탈이라는 비통한 상황 속에서 당시 민중들이 할 수 있었던 일은 ‘하나님께 의지’하며 나라를 되찾고 백성을 일으키고 자주독립을 독려하는 것이었다. 배움과 말씀의 일치 속에서 해방의 길을 찾아내고자 노력했고 그 결과, 교회는 신앙적인 성장과 민족적 책임의 강화라는 두 길을 묵묵히 걸어올 수 있었다.

이제 남은 과제는 고난의 길을 마다 않는 신앙의 자세다. 국치 100년의 때에 우리가 부끄러워해야 할 것은 아직도 ‘분단’의 살얼음판을 걸어가고 있다는 점이다. 고난의 역사는 잊혀지고 ‘축복’과 ‘부흥’만을 추구하는 사이, 정작 100년 전 신앙의 선배들이 물려 준 고난의 신앙과 구국의 신앙은 어느덧 잊혀져 가고 말았다.

국치100년 공동대표 이해학 목사는 최근 한 인터뷰에서 “성서의 정신은 힘의 횡포에 고난을 당하는 불쌍한 영혼에게 ‘아, 여기 이웃이 있다!'고 위로해 주는 것”이라며 “강제병합 100년이 되도록 그 상처를 제대로 감싸지 못한 책임이 신앙인과 교회에도 있다”고 일갈했다. 한일병합 100년이 지나도록 아직 해결되지 않은 아픔이 많기 때문이다.

고 한경직 목사 역시 기독교인이라면 고통과 환난을 두려워하지 않아야 하며 나라를 위해서는 진리의 편에서 싸워야 한다고 강조했었던 사실을 우리는 기억한다. 한 목사는 “우리에게는 환난은 피할 수 없는 것”이라며 “이 땅에 궁극적으로 자유와 평화와 통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각 방면에서 싸워야 한다”며 고난과 진리의 애국신앙을 역설했다.

역사학자 이만열 교수는 한일병합 100년을 맞아 “오늘날도 우리와 같이 식민적 고통에 있는 민족, 국가, 사람들이 있다. 이들의 눈물 씻어 줄 수 있는 성숙한 민족 되어야 한다. 고충의 역사를 자산삼아 타인을 위로하고 세워줄 수 있어야 한다. 피지배 경험 없는 국가와 민족은 그런 생각 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교수는 또 ‘올해는 국치, 일제 강제병합 100주년이다. 이런 해는 국가적으로 교회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다가서야 한다”며 “8월 29일 국치일을 의미 없이 보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고난의 역사, 치욕의 역사를 밑거름으로 삼아 우리가 해야할 수많은 과제가 떠오르는 것은 바로 우리가 기독교인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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