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든 몸과 영혼을 함께 치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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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든 몸과 영혼을 함께 치유합니다"
  • 승인 2002.04.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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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인한 추진력, 앞서가는 정확한 판단력을 지닌 사람” “근검절약정신이 투철하고 베푸는 데 인색하지 않은 사람” 대구가야기독병원 이사장 정상록장로(73·동산교회). 가까이서 그를 본 사람들은 모두 이렇게 평가한다. 그가 20년간 한결같은 기독정신으로 병원을 운영해 온 하나님의 사람이기 때문이다.

청소년운동에 나선 공로로 국민동백상을 수상하고 경산대학교로부터 명예보건학박사 학위를 수여했으며 기독교인에 의한 정치를 꿈꾸고 대구광역시 초대 시의원에 나섰다. 그러나 청치를 하며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주일성수에 곤란을 겪은 정장로는 한 번의 경험을 끝으로 정치에 대한 미련을 과감하게 버렸다.
고희를 훌쩍 넘긴 그가 아직도 주변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질병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치유하는데 앞장서고 더욱 약해져버린 심령을 회복시키기 위해 하나님의 복음을 제시하는 일을 기꺼이 감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야기독병원에 입원한 환자들은 매주 화요일과 금요일 예배에 참여한다. 병중에도 보살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 또 퇴원해서는 담임목사와의 관계를 이어줄 뿐만 아니라 초신자들에게는 가까운 교회로 연결, 신앙생활을 하도록 도움을 주는 등 그야말로 병원이라기 보다 교회공동체로 세워져 있다.

또 병원 원목실에서는 세 분의 목사와 한 분의 전도사가 매일 침상을 돌아가며 환우를 위해 예배 드리고 상심한 마음을 위로하며 깨끗한 치유를 위해 중보기도를 게을리 하지 않는다. 이러한 이유로 가야기독병원은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 병원의 이름을 알리고 있다.
그러나 현재 300병상에 최고의 의료진과 최신장비를 갖춘 지금의 가야기독병원이 있기까지 그저 순탄대로의 길만을 걸어온 것은 아니다.
가야기독병원을 이끌어온 정상록 이사장의 삶은 진정 고생의 길이었고 역경의 언덕이 수없이 넘실거리는 험난의 길이었다. 하지만 “고생을 낙으로 삼았다”는 그의 고백속에서 하나님만을 의지했기에 하나님이 주시는 고생이 결코 고생이 아닌 즐거움이었다는 하나님 중심적 인생관이 진하게 묻어 나왔다.

집사의 직분으로 교회를 섬겨오던 부모 밑에서 모태신앙으로 자라온 그는 3촵1운동에 나설만큼 항일정신이 투철한 아버지의 정신세계 탓에 9살이 되어서야 겨우 학교에 입학했다. 일본어로 수업을 받아야 했기에 일본어는 철저하게 배울 수 있는 기회였지만 예수를 잘 알지 못하던 시대라 예수쟁이로 놀림을 받기 십상이면서도 교회를 결코 멀리하는 일없이 아버지를 따라 교회를 섬기는 일에 정성을 다했던 어린시절이었다.

말씀 그대로를 따르며 살았던 부친은 부농은 아니었지만 소출의 십분의 일을 철저하게 따져 쌀가마(50가마정도)를 교회안에 쟁여놓는 일을 즐거이 했다.
아버지의 믿음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안 믿는 동네 사람들을 교회로 불러다 모아놓고 장작불을 때서 물을 데워 목욕을 시켜주고 이발도 해주며, 정신병자들을 데려다가 기도도 해 주었다. 한번은 예배에 참석하게 하여 기도하는 중에 귀신이 나가는 기적을 체험하면서 훗날 그 정신병에 시달렸던 사람이 집사가 되고 장로까지 되는 귀한 역사를 볼 수 있었다. 이런 신앙의 아버지 밑에서 자라온 그가 이웃을 돌아보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고 자연스런 결과다.

성장하는 동안 내내 목사가 되겠다고 결심했던 그의 꿈이 한순간 바뀌게 된 사건이 있었다. 충치로 크게 앓다가 어쩔 수 없이 병원에 갔다. 그런데 그렇게도 아프던 이가 주사 몇 대 놓고 쏙 빼내는데 하나도 아프지 않더라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2천원의 치료비가 나왔지만 돈이 없어 천원만을 내밀었는데도 기꺼이 자신을 돌려보내준 의사가 너무 고마워 그 일을 계기로 자신도 의사가 되겠다는 꿈을 키워가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아픈 사람들을 아프지 않게 해 주고 돈이 없어 치료를 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치료해 주는 의사가 되겠다는 꿈을 가졌으나 기회는 그렇게 쉽게 와 주지는 않았다.

매형의 주선으로 동산병원(지금은 계명대부속병원)에 첫발을 디디게 된 그는 의사자격증이 없어 조수역할을 할 수 밖에 없었지만 모든 의술을 배우고 익혀 의사 못지 않은 의술을 지니게 되었다. 그 당시 검정고시로 의사자격증을 딸 수 있는 제도가 있어 2년을 공부했지만 마침 1950년 6.25 전쟁을 만나 그 꿈마저 무산돼 버렸다. 그러나 그는 거기서 주저 앉지 않고 자신이 직접 병원을 설립할 뜻을 세워가기 시작했다.

전쟁이 끝나고 제일모직이 대구에 설립되면서 사내의료진으로의 고소득을 보장한 청빙이 있었다. 그러나 오직 기도로 살아온 아내는 믿지 않는 기업을 직장으로 갖는 것은 안 된다며 그의 이직을 반대했다. 결국 그는 기독정신을 기초로 한 동산병원을 결코 떠나지 않고 35년을 한결같이 충성했다.
그러던 어느날 그곳을 떠날 수밖에 없는 기막힌 사건이 생겼다. 1982년 기독정신을 이념으로 한 동산병원과 계명대학교와의 합병이 그것이었다. 전쟁이 나서 모두가 피난을 가고 없는 텅빈 병원을 몇 명의 의료진과 함께 지켜왔던 그에게 동산병원이 사라짐으로 곧 자신의 인생도 도둑맞은 것 같은 충격 속에 갇힐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이 자신에게 제공하신 기회이었던 것을 누가 알았으랴. 하나님께 매달리며 동산병원의 사라진 정체를 놓고 기도했을 때 자신에게 위임하신 하나님의 의지를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병원이 없어진 그 자체를 놓고 안타까워 했던 것이 아니라 기독정신을 바탕으로 한 의료, 그것이 사라진 것에 대한 아픔을 호소했던 그의 마음을 하나님이 일으켜 사용하기로 작정하셨던 것이다.
마침 정부에서도 의료보험을 확대 실시하고자 했으나 병원이 모자라자 민간인을 동원하여 병원건립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정부에서 설비자금을 융자해 주고 거액의 차관을 들여와 1년만에 병원을 세웠다. 그것도 기독정신을 바탕으로 한 대구가야기독병원이라는 이름으로 말이다.

“하나님이 꿰맞춰 주셨죠. 어쩌면 그렇게 앞뒤가 잘 맞게 일처리를 하시는지 그냥 우리는 감사하기만 했죠. 부도설을 조작하여 병원을 팔라는 협박, 등 어려움이 많았지만 은행에 대한 이자납입에 있어 한 치의 신뢰를 저버리지 않았기 때문에 은행이 저를 믿어 주었고, 또한 열번의 땅을 사서 병원을 늘려 가느라 어려움도 많았지만 하나님이 그때마다 도움의 손길을 예비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기업이었기에 당연히 하나님이 하셔야 했지요.”
그는 아내와 함께 또 다른 비전을 두고 기도하고 있다. 이제껏 그래왔던 것처럼 농어촌 목회자가 데려오는 환자들에게 의료비를 대폭 할인 해 주는 것. 어려운 사람들에게 의료혜택을 주고 토요일 오후를 택해 농어촌을 방문하여 무료진료를 해 줌으로써 시골 목회자들을 돕겠다는 것이다.

이뿐 아니라 의료보험증이 없는 외국인 노동자들의 무료진료를 베풀고 어려운 목회자들에게 선교의 손길을 펼치는 것은 물론, 이미 인도 방가로에 설립해 놓은 선교병원을 종합병원 수준으로 확장하는 일이다.
또한 지금 현재 있는 가야기독병원 또한 300병상에서 머무르지 않고 병원정문과 지하철 송현역을 연결하여 600병상의 병원으로 확장건립하는 원대한 꿈을 갖고 있다. 그렇게 확장해야 하는 이유가 단순히 병원 하나가 커져가는 것에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병든자를 만지셨던 예수님처럼, 그래서 그들의 삶속에 예수의 흔적을 남기신 것처럼, 진료를 통해 육신과 영이 나음을 얻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가 그들의 삶 속에서 아름답게 묻어나는 일들이 더욱 많아져 결국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하나님 나라 확장에 그 목적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동산병원에서 35년, 가야기독병원에서 20년. 반백년을 의료선교에 몸을 담은 정상록 이사장. “주께서 내게 복에 복을 더하사 나의 지경을 넓히시고…”라는 역대상의 말씀을 떠올리는 정장로는 그의 삶속에 복을 더하시는 하나님께 보답하고자 받은 복을 어려운 이웃에게 나누어 주는 삶을 생이 다하는 날까지 이어갈 것이다.

이석훈부장(shlee@uc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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