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가 만나야 할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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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가 만나야 할 예수님
  • 승인 2002.04.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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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을 ‘주여! 주여!’ 열광적으로 부르며 기도하며 찬양을 드리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다. 주님의 이름으로 시대를 향해 선지자적인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야말로 꼭 필요한 일이다.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낸다면 그 당사자는 얼마나 기쁜 일이겠는가?
주님의 이름으로 권능을 행한다면 주님의 영광을 나타낼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마련한 셈이 된다. 이런 멋진 일들을 해낸 사람이 있다면 그는 예수님에게 큰 칭찬을 받아 마땅할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은 이런 사람들에게 냉담한 반응을 보이신다. ‘내가 너희를 도무지 모르겠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대신에 불법을 자행하였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냉정하게 그들을 물리치신다.(마 7:21-23).

이 예수님을 곰곰이 생각할 때 과연 예수님이 그의 백성들에게 원하는 삶이 무엇인가 심각하게 묻지 않을 수 없다. 산상수훈의 맥락에서 보자면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는 삶일 것이다(마 7:12 상). 이는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삶을 말한다.
구체적인 현장에서 보자면 그러한 삶은 결국 가장 낮고 천하고 약한 사람들을 향한 사랑으로 표현된다. 이러한 삶이 얼마나 중요했으면 그 짧은 구절이 바로 율법이요 선지자라고까지 선언하셨을까?(마 7:12 하) 그러기에 진정한 사랑의 삶이 결여되면 제 아무리 훌륭해 보이는 종교적인 행위를 한다고 한들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것이 돼버린다.

한국교회는 이 점을 깊히 명심할 필요가 있다. 열렬한 기도와 찬양, 예리하고 감동적인 설교, 신유의 기적, 믿음의 다양한 능력은 여전히 넘치고 있는 것 같은데 희생적 사랑의 삶을 보기는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도 교계는 슬픈 소식들로 가득하다. 담임목사직 세습이 여기 저기서 다시 꿈틀거리고 있다. 여러 가지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우지만 밑바닥을 들여다보면 목사 일가족의 이기주의와 해당교회의 안이한 집단이기주의가 자리잡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가 하면 교회건물을 크게 져놓고 감당을 못해 목사와 교인들 사이에 반목과 갈등의 골이 깊어져 교회가 크게 상처를 입는 모습을 종종 본다. 교회의 관심이 사랑이 아닌 자기과시에 더 집중될 때 이런 슬픈 부작용들은 당연한 결과일 수밖에 없다. 교회가 진정으로 작고 약한 자를 위하여 목숨을 걸고 나서는 모습을 보기가 너무나 어렵다. 대부분 자신의 정당성을 내세우기 위한 겉치레에 머무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교회가 진정한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죄인을 사랑하시기 위해 기꺼이 고난의 길을 받아들이셨고 마침내 온 몸을 십자가 위에 아낌없이 던지셨다. 거기서 예수님의 몸은 찢기고 상하셨다. 돌아가시면서 흘리신 그 억울한 피를 오히려 자신을 못박은 죄인들의 죄를 말끔히 씻겨내시는 은혜로운 피가 되게 하셨다. 한국교회가 이 예수님을 눈물로 다시 만날 때 새롭게 부활하는 감격을 누리게 될 것이다.

박득훈목사(기윤실 건강교회운동 운영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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