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나의 마에스트로, 나는 하나님 나라의 프리마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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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나의 마에스트로, 나는 하나님 나라의 프리마돈나
  • 현승미 기자
  • 승인 2010.06.16 15: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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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마리아칼라스 김영미 교수

김영미 교수가 15세의 초초상을 연기한 오페라 '나비부인'의 한 장면.
주변에서 혹은 언론을 통해 종종 공부면 공부 음악이면 음악 특정 분야에 뛰어난 능력을 보이는 ‘신동’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 그런데 태어난 지 6개월 만에 노래를 부르는 아이가 있다면 쉽게 믿을 수 있을까? 그것도 누군가 부르는 것을 듣고 그 소리를 그대로 따라했다면 말이다.
 

올해로 57세가 된 김영미 교수(한국예술종합학교, 온누리교회·하용조 목사)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저는 형제들 중에서 가장 늦게 말문이 터졌어요. 너무 늦게까지 말을 못해 혹시 바보가 아닐까 걱정하실 정도였대요. 그런데 18개월쯤 됐을 때 엄마가 저를 재우기 위해 자장가를 불러주셨는데, 제가 음정을 하나도 틀리지 않고 그대로 따라서 흥얼거렸대요.”
 

깜짝 놀란 그의 어머니는 다시 한 번 자장가를 불러줬다. 역시 어린 김 교수는 처음부터 하나도 틀림없이 따라 불렀다.
 

사실 그는 우리나라 최초로 미국 유학을 한 성악가이자 현대음악의 선구자로 손꼽히는 ‘그리운 강남’의 작곡가 안기영 씨의 외손녀이다. 외할아버지의 음악적 재능을 올곧이 이어받은 것이다. 그 뒤로도 그는 ‘노래 잘하는 북아현동 김내과집 딸’로 불릴 정도로 지역 일대에서 유명인사가 됐다. 전국노래자랑, 어린이 음악경연대회 등 나갔다 하면 상을 휩쓸어 왔다.
 

그러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우연히 TV에서 ‘KBS 어린이노래회원’ 오디션 광고를 보고 어른들 몰래 오디션을 보게 됐다. 당연히 합격, 그때부터 방송에 출연하고 솔리스트로 뽑혀 어린이 프로그램에서 노래를 하기 시작했다. 청와대에서 노래를 하기도 하고, 초등학교 5학년 때는 동요 레코드판을 내기도 했다. 그리고 국립오페라단에서 공연하는 푸치니의 오페라 ‘라 보엠’의 아역을 맡게 되면서 그는 프리마돈나의 꿈을 꾸게 됐다.
 

“50세가 넘은 나이에 오페라 아리아를 어쩜 저리고 편안하게 부를까?”
“15세의 초초상을 저렇게 자연스럽게 연기하다니!”
지난 3월 예술의 전당 오페라 하우스에서 공연했던 오페라 ‘나비부인’이 끝난 후 관객들로부터 찬사가 쏟아졌다
 

그녀는 조수미, 신영옥 씨보다 앞서 세계 무대를 장악한 세계 진출 1세대 소프라노다. 1973년 서울예고 졸업 후 이탈리아로 건너가 유학 중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베로나 콩쿠르와 푸치니 콩쿠르 1위, 마리아 칼라스 국제 콩쿠르에서 ‘6명의 최고상’ 등 국제 성악 콩쿠르의 상을 휩쓸었다. 졸업 후 미국으로 건넌 간 그는 루치아노 파바로티 국제 콩쿠르에서 1위를 했다. 그 후 ‘사랑의 묘약’ 여주인공으로 발탁돼 파바로티의 상대역으로 오페라 계에 화려하게 데뷔했다. 이때부터 ‘라 보엠’의 미미 ‘나비부인’의 초초상 등으로 미국 오페라 무대에서 본격적으로 활동했다. 30년이 지난 지금도 계속 노래하고 있는 그녀는 고음을 안정되게 내며 음악성과 테크닉을 두루 갖췄다. 이탈리아 정통 벨칸토 창법을 탄탄하게 구사할 뿐만 아니라 내면 연기에도 강해 어떤 역이든 안심하고 맡길 수 있는 성악가로 평가 받고 있다.
 

세계적인 테너 파바로티로부터 ‘동양의 마리아 칼라스’라는 별명을 얻은 김영미 교수. 그러나 그는 우리나라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세계무대에서 몇 차례의 좌절을 경험하기도 했다.
 

그에게 더 큰 날개를 펼 수 있는 유학길은 이미 예견된 것이었다. 부모의 반대가 심했지만, 단식투쟁을 하면서까지 그는 오페라에 대한 열정을 꺾지 않았다. 그렇게 힘들게 오른 이탈리아 유학길에서도 역시 그의 재능을 맘껏 펼치며 많은 대회에서 상을 거머줬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던 작은 나라에서 온 그는 ‘마리아 칼라스’ 콩쿠르에서 좌절을 경험했다. 많은 언론이 그의 목소리를 극찬했고, 모두가 대상은 당연히 김영미 교수의 것이라고 호언장담했지만 결국 대상은 이탈리아인에게 돌아간 것이다.
이후에도 스폰서가 없다는 이유로 몇 차례나 큰 무대에서 좌절을 맞봐야 했다. 거기에 오랜 외국생활과 남편과의 불화로 인해 그는 우울증을 겪기도 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렇게 우울증을 겪고 난 후 하나님이 저에게 치유의 손길을 내미신 방법도 바로 음악을 통해서였습니다. 오히려 그때부터는 세상의 무대에 연연하지 않게 됐어요. 내가 가지고 있는 아름다운 음악으로 세상을 품어줄 수 있다면 어떤 무대든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죠.”
 

마침 그때 그가 출석하고 있는 온누리교회에서 해외전도집회인 ‘러브소나타’를 기획했다. 담임 목사의 제안으로 일본 ‘러브소나타’에 참석하게 된 그는 또 한번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했다.
 

“일본에서도 이미 몇차례 음악적 재능을 인정 받을 기회가 있었지요. 하지만 그들은 제 이름을 기억해주지 않았어요. 그저 노래 잘하는 한국인 정도로만 생각했지요. 그런데 러브소나타를 통해 많은 일본인들이 저를 기억해주기 시작했지요. 결국 이 원하시는 것은 세상 속에서 바쁘게 지내는 세계적인 프리마돈나가 아닌 세계 속에 하나님을 올바로 전할 수 있는 성악가가 되는 것이었지요.”
 

자신의 첫 번째 사명이자 궁극적인 사명은 노래로 복음을 전하는 것이라고 고백하는 김영미 교수. 그는 하나님의 선한 뜻을 이루기 위한 도구로 살아가기 위해 남들보다 더 철저하게 연습하고 스스로를 가꾸어 나간다.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되기 위해서는 당연히 최고가 되어야 하잖아요. 저는 세상의 프리마돈나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프리마돈나가 되기 위해 지금도 끊임없이 노력한답니다.”
 

샌디에고 오페라단과 ‘나비부인’을 메인으로 여섯 번 서는 파격적인 기회를 얻게 됐으나 아이를 임신한 사실을 알겨 오페라 공연을 주저 없이 포기하기도 했던 김영미 교수. 단지 음악으로서만 성공한 삶이 아니라 음악, 가정, 신앙이 조화를 이룬 삶을 사는 것이 진정 아름다운 인생이라고 생각하는 그의 이야기는 ‘프리마돈나 김영미처럼’(비전과 리더십)을 통해서 더 자세히 만나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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