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죽음에 대한 ‘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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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죽음에 대한 ‘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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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0.05.19 1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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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건 교수<고려신학대학원장>

주후 70년 전후해서 유대에는 큰 소용돌이가 일어났다. 유대인 반란(제1차)이었다. 66년에 시작된 반란은 70년에 예루살렘 멸망을 거쳐 73년에 마사다가 점령됨으로써 끝났다. 그 와중에 몇몇의 영웅과 배신자들이 나타난다.

먼저 마사다의 영웅 ‘엘리아살(El' azar)’이 있었다. 사해 남서쪽 400m 높이의 바위산 위에 있었던 마사다 성벽이 주후 73년 5월 1일, 로마군이 쏜 쇠공의 위력에 구멍이 뚫렸다. 그날 밤 성 안에서 지휘자 엘리아살은 960명의 주민들을 모아놓고 연설하였다.

“우리는 적국의 손에 붙잡혀 노예가 되기 전에 죽을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이 생명의 땅에 자유롭게 그리고 영원히 살 수 있는 길이다.” 그들은 자기 가족들을 먼저 죽이고, 그리고 상대가 남을 죽여주는 것으로(마지막 한 사람은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함) 그의 가족 곁에 쓰러져 죽어갔다. 로마 군인들이 들어갔을 때에 몇 명의 부녀자들과 아이들이 살아남아 있었으며, 그들로 말미암아 영웅담이 후세에 알려지게 되었다. 엘리아살은 오늘날까지 유대인들에게 전설적인 영웅으로 남아있다.

두 번째 예는 ‘요세푸스’이다. 주후 67년 봄, 로마군이 요타파타 성을 함락하자 갈릴리 지역 대장이었던 요세푸스는 40명의 동료들과 함께 동굴로 도망가서 자결을 주도한다. 요세푸스는 마지막 남은 동료를 설득하여 로마에 항복한다. 그리고 로마 군대의 통역관으로 계속되는 전쟁에 참여하여 예루살렘 정복을 목격한다.

그는 ‘전쟁사’를 통해 당시의 전쟁 상황, 특히 예루살렘 멸망의 상황을 생생하게 기록에 남겼다. 그리고 ‘고대사’, ‘생애’, ‘아피온에 대항하여’ 등의 여러 보고(寶庫)들을 글로 남겼다. 그러나 유대인들로부터 배신자로 낙인찍혔으며, 평생 암살의 위협을 받고 살았다.

세 번째는 힐렐의 제자였던 ‘요하난 벤자카이’이다. 주후 70년 예루살렘 성이 포위되었을 때에 “왜 무모하게 모두 죽으려 하느냐? 왜 성전이 이방인의 손에 불태워져야 하느냐?”고 외치며 항복해서 살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열심당원들에게 그는 배반자였다. 그는 자신만이라도 남아서 유대 종교를 이어나가야 한다고 결심한다. 그리고 성이 함락되기 직전 성을 탈출하여 로마 디도장군에게 항복한다. 그는 야브네 성읍에 자리를 잡고, 야브네 학당을 창설한다. 그는 유대 종교를 성전 제사 중심의 종교에서 교육(율법 연구) 중심의 종교로 탈바꿈시키는 데에 성공한 사람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후대의 유대인들에 유대 종교를 살린 영웅으로 추앙을 받는다.

용감하게 죽었던 사람, 그도 영웅이었다. 그런데 살아남은 자 중에 어떤 사람은 영웅으로 어떤 사람은 배신자로 낙인이 찍혔다. 만약 요세푸스가 없었다면 그 당시의 상황을 어떻게 알 수 있었을까? 불공평하다. 만약 요하난 벤자카이가 없었으면 오늘날 유대 종교는 어떠한 모습으로 살아남았을까? 외국은 전장에서 살아온 사람도 죽은 사람과 함께 환영을 받는 모습을 자주 본다. 한국은 죽은 사람만이 영웅이 된다. 오늘날 천안함 사건에서도 전사한 사람들이 영웅 대접을 받는다. 그런데 왜 살아남은 사람은 죄인이 되어 숨어서 살아야 하는지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할 일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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