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치하 ‘기독여성’ 독립운동에 상당한 기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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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치하 ‘기독여성’ 독립운동에 상당한 기여
  • 이현주 기자
  • 승인 2010.04.02 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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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일강제병합 100년 역사 속 여성의 모습은?

▲ 애국여성회는 여성들도 주체적인 독립운동가로 나선 일대 사건이었다.

애국부인회·송죽형제회 등 주체적 독립운동 전개
농촌운동과 절제운동까지 민족 계몽에 앞장서기도


한일 강제병합 100년을 맞아 역사를 새롭게 조명하는 움직임이 한창인 가운데 일제시대 독립운동의 중심에 여성들의 활약도 상당했다는 주장이 나왔다.

지난달 26일 교회협 양성평등위원회가 마련한 ‘기독여성 관점에서 본 한일강제병합’ 토론회에서 감신대 이덕주 교수는 여성 민족운동의 효시로 불린 ‘송죽형제회’와 ‘애국부인회’ 등을 소개하며 “기독교 여성들이 겁 없이 민족운동 단체를 결성하고 독립운동을 했었다”고 설명했다.

송죽형제회는 에큐메니칼 여성 민족운동의 효시로 불리는 항일 결사대로 평양에 있던 숭의여학교 교사와 학생, 졸업생들로 조직된 비밀 결사 조직이었다. 105인 사건에 자극을 받고 ‘죽음을 무릅쓰고 나라를 위해 헌신할’ 동지들을 규합한 송죽형제회는 생일잔치를 가장해 월 1회 회원 집을 돌아가며 모임을 갖고 기도하며 매월 30전의 회비를 걷어 국외로 망명한 독립운동가들을 지원하는 등 활발한 독립 후원활동을 전개했다.

이덕주 교수에 따르면 ‘송죽회’는 1916년 무렵 학교 졸업 및 결혼과 동시에 지방으로 흩어지면서 지방 조직도 만들게 됐으며 3.1운동 당시에는 여성 만세시위의 연락망을 맡았고 후에 애국부인회의 근거가 되기도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교수는 “송죽형제회는 한말 이후 남성들의 전유물처럼 인식되었던 민족 독립운동에 여성들이 적극 참여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며 “그 이전에도 이화학당의 구국기도회, 교회여성들의 국채보상운동 참여, 간호학교 학생들의 의병 부상자 치료 등 여성 민족은 동의 참여가 있었지만 송죽형제회처럼 적극적인 독립운동은 찾아보기 힘들다“고 말했다.

송죽형제회의 출발지가 된 숭의여학교가 감리교와 장로교회가 연합으로 운영하던 초교파 기독교학교라는 점에서 이 비밀결사대 역시 철저치 교회여성을 중심으로 그것도 감리교와 장로교 여성들이 초교파적으로 참여하였는데 이는 곧 에큐메니칼 민족운동의 효시로 불리고 있다.

3.1운동 이후 결성된 ‘애국부인회’도 여성 독립운동을 대표하는 조직으로 알려졌다. 이덕주 교수는 “전도부인과 여전도회 지도자들이 모여 1919년 11월 ‘대한애국부인회’를 결성, 임시정부를 지원하며 독립운동을 전개했다”고 밝혔다.

애국부인회는 서울과 평양지회 등을 두며 활발한 독립운동을 벌였지만 동지의 배반으로 조직이 발각되면서 간부 50여 명이 체포되고 심한 고문과 악형을 받았다.

이 교수는 “애국부인회가 우리 민족운동사와 교회사에 남긴 의미는 적지 않다”며 “3.1운동으로 남성 독립운동가들이 투옥되거나 해외로 망명함으로 독립운동 추진 세력에 공백이 생길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여성들이 그 공백을 메웠다는 점, 또 지금까지 남성들의 독립운동을 뒷바라지 하는 보조적 수준에서 결사항전을 목적으로 본격적인 항일투쟁의 수준으로 끌어올린 점 등은 높이 평가된다”고 말했다.
독립운동에는 여성단체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한 개인의 역량이 얼마나 큰지를 알려주는 인물도 있었다. 기독교여성 농촌운동의 선구자로 알려진 상록수의 최용신.

1928년 서울 충정로에 있던 협성여자신학교 교장 채핀 부인은 미국 뉴욕 컬럼비아 대학에 있던 황애덕에게 편지를 보냈다. “신학생들이 졸업하고 농촌에 가려하질 않으니 와서 그들을 계몽시켜 주시오.”
대한애국부인회 사건으로 옥고를 치룬 황애덕은 민족의 독립을 위해서는 실력을 키워야 한다는 생각에 유학길에 올랐다. 그리고 그 곳에서 농촌문제로 교육학 석사를 받았다.

이런 상황에서 농촌 교역자 양성을 도와달라는 편지를 받은 황애덕은 협셩여자신학교 안에 농촌사업지도교육과를 신설하고 농촌 운동가를 양성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길러진 제자가 최용신이었다.
이덕주 교수는 “최용신은 1931년 농촌으로 내려가 샘골에서 학교를 설립해 부녀자와 아동을 대상으로 주야간으로 민족 계몽 교육을 실시하는 등 농촌에 헌신한 인물”이라고 말했다.

기독여성들의 활약은 독립운동에 이어 계몽운동, 절제운동으로 이어졌다.
금주와 금연을 내용으로 하는 절제운동은 1923년대부터 30년대까지 한국 교회의 대표적인 민족주의 사회운동이었다. 일제가 우리 민족의 역사와 전통을 왜곡하거나 소멸하려는 전략을 진행하는 가운데 ‘황민화’정책을 쓰면서 수많은 청년 학생들이 술과 담배, 아편, 성매매 같은 퇴폐 소비문화에 빠지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교회 지도자들은 금주와 금연, 아편금지와 공창폐지를 내용으로 절제운동을 진행했다. 절제운동에 앞장 선 단체는 세계기독교여자절제회로 장로교와 감리교 교회 여성 지도자들은 1924년 조선여자기독교절제회를 창설했다. 지방을 순회하며 술과 담배의 유해성을 알린 절제운동은 ‘죽어가는 조선을 살리는 운동’으로 표현되며 일제의 감시와 방해를 받았다. 여성들이 앞장 선 이 운동은 단순한 금연 금주 캠페인이 아니라 황민화 정책에 말살되어가는 조선의 정신을 살려내려는 눈물 어린 노력이었던 것이다.

이덕주 교수는 이밖에도 일제시대 만국부인기도회 사건과 신간회와 근우회 등을 소개하며 “이러한 사건들이 한국 교회사에 남긴 의미는 적지 않다”며 “민족의 고난에 함께 하는 교회의 모습을 보여주었고 교회 일치와 연합운동에 교회여성들의 연대가 큰 힘이 됐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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