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라랏 노아 방주가 우리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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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랏 노아 방주가 우리를 부른다
  • 승인 2002.03.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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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사학회가 주관하는 금번 한국 교회 아라랏 노아 방주 대탐사가 한국 교회사와 범 세계사적으로 어떤 의미와 공헌을 할 수 있는가를 베드로후서 3장 1~13절을 중심으로 살펴보도록 하자.
첫째, 노아 방주의 역사적 실체(창 6-9장 참조)는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같이,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되었다”(벧후 3:5)는 성삼위 하나님의 우주 창조 역사를 선포한다.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며 하늘의 창들이 열려 40주야를 쏟아 부었고”(창7:11) 물이 감하여 그 방주가 “아라랏 산에 머무르기까지 150일”(창 8:4)이 소요된 엄청난 분량의 물의 근원은 “깊음의 물”(창 1:2)에서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창 1:6~7)과 “바다라 부르는 궁창 아래 한 곳으로 모인 물”(창1:9-10)과 관련되며, 창조의 셋째 날에 드러나고 성립된 것이 땅이요(창 1:9), 아버지 “하나님”(창 1:1,3)과 “하나님의 영”(창 1:2)이신 성령님과 성육신 이전의 “가라사대”(창 1:3)이신 주 예수님이 함께 사역하셨기 때문이다. 노아 방주 안착 이후로 오늘까지 건재하는 대 아라랏(‘뷔윅 아아러’ 5,165m)은 역사와 시간에 대한 우리의 창조사관을 일깨운다.

즉, 성경을 시작하는 첫 히브리어 단어인 버레쉬트(태초에)는 “영원부터 영원까지”(시 90:2)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 시간도 창조하신 것을 드러내어,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으며”(벧후 3:8), “우리 살아 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단코 앞서지 못하며”(살전 4:15), “살면 충성, 죽으면 영광”(계 2:10), “사명이 목숨보다 중요하다”(행 20:24)고 외치면서 우리로 하여금 영원에 잇대어 오늘 여기의 하루살이를 살게 하는 것이다(찬송 53장 4절 참조).

둘째, 노아 방주의 역사적 실체는 “그때 세상은 물의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하신 바 되어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벧후 3:7) 성삼위 하나님의 종말론적 우주 심판 역사를 선포한다.
예수님의 탄생으로 시작된 말세는(히 1:1~2) “많은 사람이 빨리 왕래하며 지식이 더하리라”는 예언대로(단 12:4) 우리가 인류역사 종말의 끝 부분에 살고 있음을 실감나게 한다. 성경은 말세를 마치 귀신들려 “위험하고 다루기 힘든”(딤후 3:1의 원어인 ‘칼레포스’는 마 8:28에 귀신 들린 두 가다라/거라사 사람을 묘사함) 시대로 진단하면서,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고, 하나님보다 쾌락을 더 사랑하며, 경건의 능력보다는 모양 뿐”(딤후 3:1~5)임을 노출시킨다.

예수님께서는 인류 역사의 종말이 노아의 때와 같아서,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다”(마 24:37~39)고 우리의 시대정신(zeitgeist)을 책망하신다.
그 시대는 “성령님이 영원히 사람 안에 거하지 않는 육체만의”(창 6:3) 삶이요, 육체적 향락만 추구하면서 영혼과 장래에 대해 무관심하여(창 6:1~2, 5~6, 11~12), 그 시대의 마지막 사람이 수장(水葬)되면서도 “홍수심판에서의 방주구원”을 예비하고 전파하던(벧후 2:5)노아의 메시지를 깨닫지 못하였던 것이다.
결국, “오직 방주에 있던 노아 가족 8명만 보존되었고, 그 코에 생명의 호흡이 있는 것은 모두 죽어”(창 7:21~23; ‘모두’의 원어 ‘콜’이 6회 사용) 창조무효화(uncreation; 창 1:2 비교)의 원점으로 돌아가는 것 같았다.(02-2649-5412)

김진섭(천안대 구약학, 아라랏탐사 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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