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논쟁과 신사참배 결의가 가져온 ‘교단 분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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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 논쟁과 신사참배 결의가 가져온 ‘교단 분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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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0.03.10 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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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희국 교수<장신대 교회사>

한국의 장로교회는 선교 초창기부터 30년 이상 선교사들의 영향을 통해 신학 노선이 형성되어 갔다. 선교사들의 신학 입장 또한 출신 학교별로 구별되었다. 192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한국의 신학 조류가 서서히 달라지기 시작했다.

외국 유학을 한 젊은 신학자들이 귀국하면서 교육기관과 교회에 자리 잡기 시작했다. 당시에 신학교육의 주도권은 여전히 선교사들이 가지고 있었지만, 젊은 신학자들이 성경 해석에 역사비평학을 도입해서 진보적인 신학을 소개함으로써, 기존의 보수적인 신학노선과 갈등을 일으키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물론, 외국에서 공부를 한 유학생들 모두가 성서비평학을 도입한 진보적인 신학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이에 비해서, 장로교회의 신학은 대체로 보수적인 칼뱅주의를 견지하는 분위기 속에서 평양 장로회신학교에서 가르치는 온건 보수적인 선교사 몇몇이 역사비평학을 부분적으로 소개했다.

장로교회에 진보적인 신학이 들어오게 된 경로는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선교사들이 소개하였고, 나머지 다른 하나는 외국에서 유학한 조선인 신학생들이 소개하였다. 전자의 경우엔, 서고도(徐高道, W. Scott), 배례사(裵禮仕, Edward J. O. Fraser) 등 주로 캐나다 선교사들이 1900년대 초기부터 캐나다 선교 지역을 중심으로 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미국 장로교회 선교사들이 선교의 주도권을 쥐고 있었으므로 캐나다 선교사들의 진보적인 신학은 그리 큰 영향력을 끼치지 못하였다. 후자의 경우엔, 1925년 이후 일본과 미국으로 유학을 갔던 조선인 신학생들이 귀국하면서 그 영향력이 점차 확대되었다. 이리하여, 1930년대 중반에 이르자 장로교회 안에는 보수와 진보 사이에 신학적 갈등이 조금씩 드러났다.

이후 1938년 교단 분열의 씨앗이 된 총회의 신사참배 결의에 의해 갈등은 더욱 커졌다. 신사참배를 강요해오는 일제의 압력에 장로교회 일부는 굴복하기 시작했다. 8.15 광복과 함께 장로교회는 교회 재건과 함께 새로운 출발을 위해 지나온 과거의 역사를 청산해야 할 과제를 안고 있었다.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과제는 일제의 힘에 굴복한 신사참배 문제였다.

하지만 이와 관련된 결의는 실행되지 못한 채, 신사참배 굴복에 대한 해결책과 교회 재건안을 놓고도 상반된 견해가 대립했다.

이후 보수 진영과 진보 진영의 다양한 신학적인 차이로 인한 논쟁으로 1951년 1차 분열로 ‘고신’(고려신학교) 교단이 생성됐고, 이후 ‘기장’(기독교장로회) 교단과 ‘예장 합동’과 ‘예장 통합’ 교단도 생겨났다.
일제 강점기 말기의 신사참배에 대한 회개 요청, 또 보수 진영과 진보 진영의 신학입장 차이가 교단분쟁의 핵심 요인이었다. 1950년대에 장로교회는 세 차례나 분열했고, 그 결과 하나의 교단이 넷으로 쪼개어졌다. 교단분열의 씨앗은 이미 1930년대에 심어졌는데, 그 당시의 신학(이념) 논쟁과 총회의 신사참배 결의(1938년)가 그 씨앗의 알맹이였다. 그리고 1950년 6.25전쟁 직후부터 본격적으로 분열된 교단들은 각각 정통 교리, 배타적 집단의식, 반공 이념과 맞물린 흑백논리 등으로 자기의 아성을 높이 쌓아 올렸다.

그동안, 분열된 장로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위해 여러 기구와 단체가 결성되었다. 또한 동일한 목표 ‘교회 갱신과 일치’를 정해놓고 그 뜻을 모아 함께 일하는 목회자 운동도 일어났다. 이제는, 장로교회 교단들이 보다 더 힘써 연합과 일치를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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