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이 피어나는 여성노숙자 쉼터…성수삼일교회 '내일의 집'
상태바
희망이 피어나는 여성노숙자 쉼터…성수삼일교회 '내일의 집'
  • 승인 2002.03.24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허름한 상가건물 2층. 어두컴컴한 계단을 올라서 철문을 열었다. 따뜻한 온기가 뿜어져 나온다. 전혀 가정집이 있을 것 같지 않은 이곳에 20여명의 대가족이 살고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성수동 ‘내일의 집’. 이 집의 이름이다. 성도 고향도 틀린 여자들만의 집인 이곳은 바로 여성노숙자들의 쉼터다. 현재 아홉개의 모자가정이 한 집을 이루고 있다.
98년 처음 ‘내일의 집’이 문을 열었을 때 서울시는 여성노숙자가 열손가락안에 드는 적은 수라고 장담했다. 사실 서울역이나 용산역 등 거리에서 노숙하는 여자들은 많지 않았다. 집을 나온 여자들은 성폭력의 위험이 있는 거리 노숙을 할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여성노숙자의 수는 수백명에 이르렀고 그들은 사람의 눈에 띠지 않는 여인숙이나 기도원, 교회건물 등을 전전했다. IMF의 태풍이 한참 휘몰아치던 98년에는 경제파탄으로 가정이 해체되어 거리로 나선 노숙자들을 종종 볼 수 있었다.

남편학대에 거리로 나온 아내
5년이 흐른 지금, 내일의 집에는 경제적 고통보다 폭력에 희생되어 집을 뛰쳐나온 아내들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남편들은 알코올에 중독됐거나 노름에 빠졌다. 그리고 가정을 지키지 못한 자신의 컴플렉스는 의처증으로 발전하고 아내를 구타하기에 이른다. 아내구타는 아동학대로 이어진다.
34살에 세아이의 엄마이기도한 정은경씨(가명)는 지난해 7월 노름빚으로 아내와 자식을 버리고 도망간 남편을 기다리다 빚독촉에 못이겨 집을 나왔다. 그리고 여성상담전화 1366의 도움으로 성수동 쉼터를 찾았다.

“충남태안에서 작은 규모지만 장사를 하면서 살고있었어요. 그러던 어느날 빚쟁이들이 들이닥쳤죠. 남편이 노름에 빠져있었던 거죠. 우리 가족들은 빚쟁이들을 피해 안면도로 들어갔고 그곳에서 어떤 사람의 도움으로 일자리를 얻었어요. 하지만 남편은 남의 돈 2천만원을 가지고 어디론가 떠나 버렸죠.
가장이 없는 상태에서 낯선 사람의 집에 더이상 머무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을 데리고 쉼터에 들어왔어요.”남편의 소식은 아직도 들을 수 없지만 가족을 버린 남편을 찾을 생각은 없다. 단지 어떻게든 네식구 살아갈 방법을 마련해야겠다는 생각뿐이다. 처음 쉼터에 도착한 후 공장에서 일을 하며 돈을 벌던 정씨는 최근 야쿠르트 일을 하며 자활을 꿈꾸고 있다.

서울시가 노숙자가운데 직장을 구하고 월 40만원씩 저축하는 사람에게 지원하는 전세를 신청했다. 8개월간 함께 했던 쉼터식구들하고 헤어지는 것은 아쉽지만 언제까지 이곳에 머물수는 없는 일이다.
정씨의 경우는 그나마 나은 편이다. 남편에게 구타당하는 일은 없었으니 말이다. 20년동안 남편에게 폭행당해온 김영자씨(가명). 쉼터를 찾은 것은 지난 1월. 약 한달간은 상한 몸을 추스리느라 아무일도 할 수가 없었다. 지금도 그녀는 남편이 쉼터를 찾아내 자신을 데리고 갈까봐 겁에 질려 있다.

“집을 나온적도 여러번이고 남편이 모르는 곳으로 도망다닌 적도 있었죠. 하지만 번번히 남편에게 잡혀왔어요. 친정으로 도망가기도 여러 차레였는데 이렇게 쉴 곳을 찾게 되니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이곳에 오기 직전에도 남편에게 구타를 당했는데 진단서만 있으면 이혼이 가능하다고 해요.”

최악의 선택은 '이혼'
김씨의 소망은 남편과 이혼하고 아들을 데려와 함께 사는 것이다.
김씨 뿐 아니라 이곳에 숨어 지내는 대부분의 여성들이 남편과 이혼하길 소망하고 있다. 하지만 의처증이 있는 남편들은 쉽사리 아내와의 이혼을 허락하지 않는다.
내일의 집을 운영하는 성수삼일교회 정태효목사는 여성노숙자들이 새 삶을 찾을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남편과 이혼하는 것뿐이라고 어렵게 말을 열었다.

“알콜에 빠지고 노름에 빠진 남편들은 대부분 가정폭력을 휘두릅니다. 한번 아내와 아이들을 때리고 나면 그 다음은 더쉽게 폭력을 사용하게 되죠. 아내들은 이런 남편의 문제를 알기때문에 치료와 상담을 권하지만 정작 남편들은 자신의 문제를 인정하지 않아요. 오히려 남편을 걱정하는 아내에게 다른 남자가 생겼다는 의심의 눈초리를 보낼 뿐이죠.
이미 남편에게 한번 구타를 당한 아내는 감히 대항할 엄두도 내지 못합니다. 주눅이 들고 겁에 질려 여자들은 결국 아이들을 데리고 집을 나오는 최악의 선택을 하는거에요.”‘최악의 선택’. 하지만 이들에겐 최선의 선택일지도 모른다. 더이상 피할 곳도 없는 아내들은 싸구려 여인숙이나 기도원을 전전할 지언정 다시는 남편과 마주치고 싶지 않다.

20대 중반의 김은경씨(가명)도 마찬가지다. 술과 여자에 빠진 남편이 도리어 김씨에게 남자가 있다며 폭행을 일삼았다. 4살난 아들을 데리고 집을 나와 교회 집사님댁에 숨어 있다가 이곳 쉼터로 오게 됐다. 성수삼일교회에서 운영하는 재활용매장 ‘녹색가게’를 맡아 운영하고 있는 김씨도 자활의 집을 신청했다. 아들과 단둘이지만 새로운 가정을 꾸미고 싶기 때문이다.
내일의 집은 최장 1년 6개월 이상 머무를 수가 없다. 건강을 되찾고 일자리를 구한 뒤 서울시가 지원하는 자활의 집으로 독립을 해야만 한다. 처음 쉼터에 온 여성노숙자들은 공동생활을 불편해 한다.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 일과에 맞춰 움직이는 것이나 낯선 사람들과 몸을 부대며 한 방에서 생활하는 것이 쉽지만은 않다. 그래도 자활의 집보다는 이곳 쉼터가 좋다. 누군가를 걱정해주고 마음의 상처를 치유해주고 서로를 위해 기도해주는 따뜻함이 배어 있기 때문이다.
정목사는 쉼터를 찾은 여성노숙자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자활의지라고 말한다. 음식을 만들고 청소를 하며 나와 내 아이들을 책임지는 방법을 다시 익힌다. 그렇게 삶을 다시 시작한 노숙자들은 쉼터 상담사와의 꾸준한 대화를 통해 마음의 상처를 치료하고 미래에 대한 희망을 하나씩 갖기 시작한다. 남자 노숙자들보다 여자들이 자활이 빠르다. 아마도 모성본능이 그들을 자극하기 때문인 것 같다.

쉼터 가족의 소망
한주를 시작하는 월요일 아침. 식사당번 정씨가 주방에서 아침을 짓고 있다. 아이들은 학교에 갈 준비를 하고 엄마들은 출근준비를 한다. 봄내음이 물씬 묻어있는 냉이국. 아침식사가 끝나면 다들 삶의 터전으로 나가고 쉼터는 고요해진다.
학교와 어린이집이 끝나면 아이들은 교회가 운영하는 방과후교실에서 특기를 배우고 숙제를 한다. 저녁시간이 되면 공장으로 일나갔던 식사당번 박씨가 먼저 집에 들어온다. 분주히 저녁식사를 준비하면 20여명의 대가족이 하나둘씩 쉼터로 돌아온다.

쉼터의 저녁시간. 쉴새없이 뛰어다니는 아이들과 TV앞에 모여 앉은 엄마들 사이에 웃음이 끊이질 않는다. 이제 곧 자활의 집으로 나갈 사람과 아직 세상이 두려운 사람들. 그들은 서로를 위로하며 미래에 대한 소망을 나눈다.
“나와 내 아이들이 살 작은 집만 있다면 정말 열심히 살수 있을것 같아요. 고통받은 시간들이 두렵긴 하지만 아이들을 위해서 이겨내야죠.”상처받은 여자들의 쉼터 ‘내일의 집’. 몸과 마음에 새살이 돋을 무렵, 이들의 미래도 새 꿈으로 되살아 난다.

이현주기자(Lhj@ucn.co.kr)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