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르포] 끝나지 않는 겨울, 용산에서 만난 눈물의 성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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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르포] 끝나지 않는 겨울, 용산에서 만난 눈물의 성탄
  • 최창민
  • 승인 2009.12.23 17: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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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산참사 후 11개월, 다시 찾은 현장

“사철에 봄바람 불어있고 하나님 아버지 모셨으니 믿음의 반석도 든든하다 우리집 즐거운 동산이라”

사철이 지났지만, 봄바람은 불지 않았다. 용산참사로 남편을 잃고 아들을 감옥에 보낸 전재숙 집사(68)는 1년 전 온가족이 부르던 찬송가를 기억해내며 눈시울을 붉혔다. 지난 성탄에 함께 부르던 찬양도 이젠 들을 수 없게 됐다. 세상은 봄, 여름, 가을을 보내고 다시 겨울이 됐다. 그러나 이들의 계절은 겨울에서 멈췄다.


# 용산을 지키는 사람들

성탄을 2주 앞둔 지난 10일. 아침부터 가랑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먹물을 흩뿌린 듯 어두운 하늘에서 무심하고 지루하게 내리는 빗방울에 용산 그곳은 눅눅하게 젖어 있었다. 길 가던 몇몇은 발을 멈추고 처참한 현장에서 새어나오는 불빛을 바라봤다.

‘세상은 사는 것이 아니라 사는 곳입니다.’ 현수막이 곳곳이 해진 채 건네는 말에 숙연한 마음까지 든다. 신호를 기다리는 사람들도, 차도에 멈춰선 차량도 눈길을 한 번씩은 준다. 찬바람을 피해 한껏 움츠린 옷깃 사이로 치열하게 견디고 있는 이들에 대한 미안함이 스물 스물 기어들어온다.

참사 현장 근처에서 한 청년이 벙거지 모자를 눌러쓴 채 기타와 앰프 하나에 의지해 공연을 하고 있었다. ‘용산 참사 해결하라’는 짤막한 문구를 붙인 그는 홀로 모금공연을 하고 있었다. 무슨 이유에선지 그 옆에는 경찰 네 명이 제복을 입고 그곳을 지키고 있었다. 지나가던 이가 주머니에 손을 부벼 넣고 동전 한 닢을 찾더니 그냥 지나친다. 청년의 노랫소리는 더 카랑카랑해졌다.


# 11개월 버텼는데 끝까지 간다

▲ 평범한 신앙인 전재숙 집사는 용산참사로 남편을 잃고 아들을 감옥에 보낸 채 슬픔의 날을 보내고 있다.
“아직 장례도 못치루고 11개월을 보냈습니다. 처음에는 정신없이 시간이 지나갔는데, 지금 조급한 마음은 없습니다. 지금까지 버텼는데 1년이고 10년이고 못 버티겠습니까?”

전재숙 집사는 지난 1월 20일 새벽 발생한 용산 참사로 남편 이상림(72)씨를 잃었다. 서울 용산4구역 재개발지역 철거를 앞두고 삶의 위기를 맞은 철거민들이 생계 보장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고, 이를 진압하기 위해 경찰이 투입됐다.

유난히 추웠던 그날, 건물 옥상에 설치된 망루에서 저항하던 철거민 5명과 이를 진압하던 경찰관 1명이 목숨을 잃었다. 철거민들의 시신을 순천향병원에 안치한 채 11개월이 지났다. 1년이 다되도록 추운 길바닥에서 정부의 사과와 구속자 석방, 생계 보장을 요구하며 현장을 지키고 있다.

“추석때 총리가 우리를 찾아왔을 때 내심 기대를 했었습니다. 와서 눈물도 흘렸고, 정말 그분이 저희 편에 서서 말씀하시길 바랐죠. 그런데 아직까지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정부는 책임질 일이 없다는 말만 되풀이 하네요.”

지난 추석 정운찬 총리가 전격적으로 용산을 방문했다. 10개월여 만에 처음으로 유가족들이 참사 해결에 대한 기대를 갖게 된 날이었다. 정부의 첫 현장 방문에 가족들은 가슴을 졸이며 며칠을 보냈다. 그러나 정부의 태도변화는 없었다.

같은 달 28일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7부(재판장:한양석)는 철거민 7명에게 5~6년 중형을 선고했다. 3천 쪽에 달하는 수사기록을 공개하지 않았지만 검찰의 모든 기소 내용을 그대로 인정한 것이다. 용산대책위는 즉각 “우리는 대한민국의 사법부에 절망했고 고인들과 철거민들의 명예는 또 다시 짓밟혔다”며 반발했다. 최소한의 생계 보장을 요구했던 절박한 상황을 국가는 받아들일 수 없었던 걸까. 법원은 참사의 책임을 철거민들에게만 돌렸다. 이 판결로 전 집사의 아들 이충연 씨는 6년을 선고받았다. 전 집사는 “아들이 아버지와 친구를 죽였다는 죄를 얻었다”며 입술을 떨었다.

“부산 사격장 폭파 사고 때 정부 관계자들이 일본 유가족들에게 무릎 꿇고 사과했습니다. 그것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먼저 했어야 했습니다. 국민이 먼저여야 하지 않습니까?” 전 집사는 “여기서 내려놓고 갈 수도 없고 가서도 안 된다. 끝까지 갈 것”이라며 상복 치맛자락을 움켜잡았다.


# “하나님은 없는 자 편” 신앙으로 견뎌

기나긴 투쟁에도 참사 유가족들은 외롭지 않았다. 아픔을 함께하며 묵묵히 돕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개신교 모임인 ‘촛불을 켜는 그리스도인들’(대표:최헌국 목사)은 매주 목요일 저녁 이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고 있다.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도 현장에서 천막 농성을 벌이면서 매일 미사를 드렸다. 그들 곁에서 많은 성도들이 함께 기도하고 있다.

“예배가 큰 힘이 됐습니다. 저희끼리 있었다면 오래 버티지 못했을 겁니다. 함께 노숙하시는 신부님과 개신교 목사님들이 있었기 때문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없는 자 편에 서시는 분입니다. 우리를 버리지 않으실 겁니다.”

전재숙 집사는 용산참사 이후 섬기던 교회(신용산교회)도 더 이상 다니지 못하게 됐다. 한 교회 안에서 재개발 찬성파와 반대파의 갈등이 심했고, 참사 이후 교회를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전 집사는 믿음을 잃지 않았다. 기자와 만나는 동안 함께 기도하는 사람들에게 고마움을 전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고백을 연거푸 했다. “믿음으로 이기고 나가겠다”는 말도 덧붙였다. 이 문제가 해결되면 출석 교회를 다시 정할 작정이다.

“돌아가신 남편은 성경을 너무 좋아하셨습니다. 새벽 기도를 갔다 오면 성경을 손 글씨로 써가면서 읽으셨어요. 말씀을 쓰면서 보면 마음에 새겨진다면서….”

죽은 남편의 신실한 믿음을 회상하던 그녀는 믿음이 있었기에 지금까지 견딜 수 있었다고 말했다.


# “저희에게 성탄이 있을런지….”

저녁 7시쯤 되자 교인들이 삼삼오오 모여 들었다. 50여 명의 성도들은 손에 촛불을 들고 줄지어 앉았다. 이들은 용산참사 해결과 유가족을 위해, 공의로운 사회를 위해 기도했다.

 정의평화를 위한 기독인연대 김동한 대표는 “그들은 아직도 차가운 냉동고에서 나오지 못하고 있다. 유가족들의 가슴에 피멍울로 남아 있다”며 “이 원통함을 풀어야 한다”고 말했다. 김 대표는 “서양의 존경받는 지식인들이 한국의 인권문제를 걱정할 정도로 창피해졌다”며 “험악한 세상에 오신 예수처럼 우리도 이 현장을 지켜야 한다”고 말했다.

또 다른 철거민 노한나 집사는 “지금 가진 자들이 약자들을 내쫓는 현실”이라며 “하나님이 저희를 내버려 두시지 않으시고 여러분들을 보내주셨다”고 예배에 참석한 이들에게 감사의 말을 전했다. 노 집사는 “하나님이 저희를 죽음에서 지키시고 함께 하실 것”이라고 말했다.

이들은 다가오는 성탄절에도 용산참사 유가족들과 함께 할 계획이다.

전재숙 집사는 성탄절을 어떻게 보낼 계획이냐는 기자의 질문에 “저희에게 성탄이 있을런지…”라며 말끝을 흐렸다. 그녀의 등 너머로 재개발을 마친 초고층 아파트 세동이 형광 불빛을 번쩍이며 내려다보고 있었다.

2천년 전 아기예수는 베들레헴 마굿간에서 나셨다. 가장 낮은 곳에 오신 예수님. 그의 탄생을 축하하는 경배와 찬양이 드려진 현장도 누추하던, 가축의 먹이를 담아두던 말구유였다. 예수가 지금 오셨다면 어디로 찾아오실까. 다가오는 성탄절에 이들이 바라는 몇 가지 것들이 이뤄질 수 있을까. 2009년 용산은 그 어느 곳보다 성탄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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