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33강) 감당할 사명이 남아있는 한 죽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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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33강) 감당할 사명이 남아있는 한 죽지 않는다
  • 승인 2009.08.13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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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와 야고보의 다른 운명




사도행전 12장에서 저자 누가는 베드로와 헤롯 아그립바(1세)를 소개하면서 두 가지 점을 강조하고 있다. 첫째로, 베드로가 헤롯으로 인해 강제로 예루살렘을 떠나게 되어(행 12:17) 이방세계에 복음을 전함으로써 이제 초점이 교회 확장의 주역이 될 바울에게로 옮겨지게 되었다.

둘째로, 헤롯의 난폭한 핍박으로 인해 유대인들의 교회 핍박이 그 절정에 이르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와 그 성도들은 마침내 유대인들에 의해 배척을 당하게 되었고, 결국 이제는 이방인에게로 나아가야 할 때가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다음 장(행 13장)에서 우리는 안디옥 교회에 의해 초대교회 최초의 선교사가 이방인들의 전도를 위해서 파송되는 장면을 보게 되는 것이다.

12장을 시작하면서 누가는 두 사도가 헤롯에 의해 체포되어 그 중 하나인 야고보는 죽고, 베드로는 옥에 갇혀 있다가 교회의 간절한 기도로 말미암아 석방된 사실을 보고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두 사도 모두 동일하게 생전에 주님의 총애를 받던 제자들이었는데, 체포되었다가 어찌하여 야고보는 악한 왕 헤롯에 의해 순교를 당하고, 베드로는 살아서 석방되었는지 궁금함을 갖게 된다. 어찌하여 하나님은 야고보는 죽게 하시고, 베드로는 살게 하셨을까? 물론 두 사람 모두 전지, 전능하신 하나님의 오묘한 계획에 따라 그렇게 되었겠지만, 두 사람에게 나타난 다른 결과를 통하여 우리는 사람들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의 한 단면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하여 우리는 야고보의 경우, 주님 생전에 성급하게 내뱉은 서원(誓願)으로 말미암은 결과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알다시피, 마가복음에 의하면 주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기 전 마지막으로 수난을 예언한 후, 세베대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다른 열 제자 몰래 주님께 찾아와 주님이 예루살렘에 들어가 영광의 보좌에 앉게 되면 하나는 주님의 우편에, 다른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해달라고 요청하였다(막 10:35-37).

그 때 주님은 그들의 허무맹랑한 요청을 한탄하시며, 과연 그들이 자신이 받을 세례와 잔을 받을 수 있는지를 물으셨다. 그러자 그들은 할 수 있다고 자신 있게 대답했는데, 사실 그것은 주님처럼 십자가 형(刑)을 당하는 고난 및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들의 성급하고 무모한 서원의 결과로 인하여, 야고보는 사도로서 미처 활약하기도 전에 그만 일찍이 순교의 제물이 되고 말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도 종종 상황에 따라 서원을 하기도 하고, 그에 따라 그 서원에 묶이는 경우도 없지 않은데, 야고보의 경우를 고려할 때 서원을 할 경우 매우 신중하게 판단한 후 결정해야 할 것으로 믿는다.

베드로의 경우, 주님 생전에 비록 실수를 하기는 했지만, 즉시 뉘우쳐 회개하고 오순절 성령 강림 후 완전히 변화하여 초대교회 수립에 가장 크게 활약을 하였다. 아울러 이후 이방인의 교회 영입 문제를 논의할 때, 사도회의에서(행 15장) 여전히 감당해야 할 몫이 아직 남아있었다. 그리하여 야고보처럼 죽을 위기를 맞았지만, 하나님은 그를 살려내어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할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했던 것이다.

이로써 우리는 사명이 있는 한 죽지 않는다는 사실을 다시금 확인하게 된다. 또한 여기서 우리가 깨닫게 되는 또 하나의 교훈은 사람들 사이의 비교의 무의미함이다. 같은 사도인데 누구는 죽이시고 누구는 살리시는가라고 우리는 하나님께 반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생사 문제는 전적으로 하나님께 달려있는 것으로, 우리는 단지 주어진 결과에 순종할 뿐이다. 결국 야고보는 인간적으로 볼 때 별로 남긴 업적이 없음으로 그 사명이 거기까지인 것이고, 반면 베드로는 아직도 여전히 그 사명이 남아있던 까닭에 죽음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또 한 가지 여기서 궁금한 점은 사도행전 1장에서 사도였던 가룟 유다가 죽었을 때는 보궐선거를 통해 새로운 사도를 선출하였는데, 왜 야고보가 죽었을 때에는 보궐선거가 없었는가 하는 의문이다. 그러나 만일 이런 식으로 사도들이 죽을 때마다 보궐선거를 치러야 했다면, 결국 사도는 열둘로 제한되지 않게 될 것이었다.

그렇다면 유다가 죽었을 때 보궐선거를 통해 맛디야를 선출했던 것은 유다가 사도답게 죽지 않음으로써 사도직을 상실했기 때문이고, 반면에 야고보는 헤롯 왕의 핍박에 의해 죽음으로써 사도답게 죽었음으로 여전히 사도직을 유지했기 때문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사도가 되는 것도 큰 영예이나, 그보다는 사도답게 살다 사도답게 죽는 것이 더 큰 영예임을 깨닫게 된다. 오늘 우리는 모두 높은 자리에 오르기를 힘쓰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높은 자리에 합당한 삶을 살다가 죽는 것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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