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26강) 치유와 구제를 통한 효과적인 복음 증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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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26강) 치유와 구제를 통한 효과적인 복음 증거
  • 승인 2009.06.17 1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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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아 치유 및 다비다 소생 사건






다비다(아람어; 헬라어로는 도르가, 모두 ‘사슴’이라는 뜻이다)의 소생 기사는 두 가지 측면에서 우리에게 교훈을 주고 있다. 첫째, 이 기사는 바로 앞에 기록된 룻다의 중풍병자 애니아의 치유사건과 연결되어 소개되고 있는데(행 9:32-350, 이처럼 두 개의 치유 사건을 연속적으로 나란히 소개함으로써, 누가는 베드로의 사역으로 인해 은혜를 입은 사람이 남자만이 아니라 여자도 있었음을 밝히고 있다.



다시 말하면, 이 두 기사는 함께 하나로 묶여지면서, 새 시대에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누리는 수혜 대상에 있어서 더 이상 남자와 여자 사이에 어떠한 차별이나 불평 등이 존재하지 않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둘째, 다비다 사건은 바로 다음에 이어지는 고넬료 사건과도 연결되는데, 이 경우 공통점은 두 사람 모두 구제와 선행을 많이 베풀었다는 것(행 10:2, 4)과, 그 두 사람을 통해서 다른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는 사실이다(행 9:42; 10:33, 48). 고넬료는 그 선행과 구제로 인해 그의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되어 자신과 노예를 포함하여 온 가족도 구원 받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베드로를 통해서 그의 개종 사실이 예루살렘 공회에도 전달되어, 마침내 예루살렘 교회가 이방인 전도를 승인함에 있어서 결정적인 계기를 만들었던 장본인이 되었다.

그런데 이 사건 앞에 다비다의 선행으로 인한 복음전도가 기사가 소개됨을 통해서 우리는 다비다 기사와 고넬료 기사가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보게 된다. 즉 한 이방인 남자의 선행과 회심으로 인한 커다란 결과 못지않게 한 이방인 여자인 다비다의 선행으로 인한 결과를 누가는 중요하게 부각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성령님이 주관하시는 새로운 교회 시대에 여자들은 남자들과 동일하게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뿐만 아니라, 또한 동일하게 복음전도에 참여하여 귀한 결과를 낳음으로써, 하나님 나라 확장에 이바지했음을 발견하게 된다. 한 마디로, 누가는 새 시대에 여자들은 은혜의 수혜자와 전달자의 두 가지 역할을 남자들과 동등하게 수행하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밖에 다비다의 소생 사건이 우리에게 주는 또 다른 교훈은 누가신학의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인 구제에 대한 강조이다. 만일 다비다가 생전에 구제를 많이 하지 않았더라면, 그가 죽었을 때 그 동료 과부들이 그토록 슬퍼하지 않았을 것이고, 아울러 그를 위하여 사도 베드로를 청하여 부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죽었다가 다시 소생할 수 있었던 것은 생전에 가난하고 불우한 이웃에게 선행과 구제를 많이 베풀었기 때문인 것이다.

또한 그가 소생함으로 말미암아 그 소문이 온 지방에 퍼져나가 온 욥바 사람이 이 사실을 알고 그 중 많은 사람이 주께로 돌아오기도 하였다(행 9:42). 결과적으로, 다비다의 선행과 구제는 그로 하여금 육체적 생명을 되돌려 받게 되는 축복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많은 영적 생명을 주께로 돌아오게 만드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이 사건은 복음전도에 있어서 선행과 구제의 중요성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좋은 예가 될 것이다.

이와 함께, 이 사건 앞서 기록된 애니아 사건에서는 중풍병자의 치유 사건을 통하여 많은 사람이 역시 주께로 돌아온 것을 발견한다(행 9:35). 이 두 사건을 한데 묶어 참작할 때, 우리는 초대 교회가 말로만의 전도에 국한하지 않고, 우리 주님처럼 치유와 구제 등의 방법을 통해서도 복음을 효과적으로 증거했고, 그 결과로 많은 열매를 거두었음을 발견하게 된다. 하나님은 베드로나 바울 같은 위대한 설교자들을 사용하시지만, 동시에 다비다와 같이 친절의 재능을 가진 사람들을 사용하시기도 한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가 주목해야 할 또 한 가지 사실은, 다비다가 생전에 구제하여 도운 과부들이 성도들이 아닐 수 있다는 점이다(행 9:41). 이 말은 다비다가 그리스도인들만을 구제한 것이 아니라 불, 불신을 막론하고, 그의 도움이 필요한 모든 이에게 구제의 손길을 베풀었다는 것이다. 마치 이것은 누가복음의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눅 10:30-37) 아웃사이더(outsider)인 사마리아 사람이 인사이더(insider)인 강도 만난 유대인을 도왔던 것과 유사하다 하겠다. 거기서도 이웃은 어떤 관계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순전히 도움의 필요성에 의해 결정되었던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구제를 시행할 때 다분히 교회 내의 일로 국한시키는 경향이 없지 않은데, 물론 사도 바울의 교훈처럼(갈 6:10) 믿음의 가정을 우선해야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제 대상인 이웃을 너무 제한적으로 설정할 것이 아니라, 모든 장벽을 넘어서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모든 사람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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