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121강) 위험을 무릅쓴 숨은 제자들의 헌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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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121강) 위험을 무릅쓴 숨은 제자들의 헌신
  • 승인 2008.10.09 1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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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마대 요셉과 여인들의 헌신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 아리마대 출신의 요셉이 총독 빌라도에게 찾아와 주님을 매장하기 위해 그 시체를 달라 요청하여 허락을 받은 후 자기 자신의 무덤에 주님을 안장하였다(눅 23:50-56).

여기서 요셉은 마치 탄생 기사에 등장하는 주님의 육신의 부친인 요셉을 상기시키는 긍정적 방식으로 묘사되고 있다(눅 2:25, 38). 마태와 요한은 그를 예수님의 제자로 묘사하지만, 마가와 누가는 침묵하고 있다.

그러나 세 기자 모두 아리마대 요셉이 예수님의 사역에 동정적이며, 또한 자신을 산헤드린 공회의 결정과 분리시키기 위해 실제적 제스처를 취하고자 했다는 인상을 남기고 있다.

이러한 그의 행동은 법에 의해 처형된 죄인은 땅이 그 죄인에게 내려진 저주로 인해 더럽혀지지 않기 위하여 어둠이 내리기 전에 신속하게 매장되어야 한다는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의도가 담겨 있다고 하겠다(신 21:22-33).

그러나 아마도 이 율법은, 사도행전에서 자주 인용되는 것을 고려할 때, 초대 교회의 성도들의 마음에 깊은 인상을 남겼으리라 생각된다(행 5:30 10:39; 요 19:31; 갈 3:13; 벧전 2:24). 주님 당대에 처형된 죄인은 사실 공공장소에 불명예스럽게 묻히곤 하였다.

따라서 요셉이 빌라도에게 주님의 시체를 요구한 것은 요셉에게는 어느 정도 위험부담이 있는 행동으로써, 이처럼 요셉은 자신의 신변에 위험을 감수하면서라도 주님을 따르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측면을 고려할 때, 비록 누가가 그를 가리켜 “제자”라 부르지 않았다 할지라도, 그는 분명 소위 “정착제자” 중 한 사람이었을 것이란 사실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장례의식은 누가와 요한복음에서 상세하게 설명되고 있다. 이것은 유대인들의 비방에 대항하여, 주님이 죄인으로써 매장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또한 이것은 가현설적 주장에 대하여 주님 죽음의 실재를 강조하기 위함도 내포한다. 주님의 죽음은 사건일 뿐 아니라 하나의 상태를 보여준다.

이 말은, 비록 그것이 끝까지 이른 것은 아닐지라도, 육신의 부패와 분해가 시작되었음을 가리킨다. 따라서 부패를 막는 향품과 향유가 필요했던 것이다(눅 23:56, 24:1). 여기에는 죽음의 위협에 대한 플라톤적 회피는 존재하지 않는다. 영원히 살아계신 예수님은 바로 죽으신 예수님이다(계 1:18).

이때에도 여인들은 주님께 대한 마지막 헌신을 몸소 실천하였다. 즉 돌아가 향품과 향유를 준비하였던 것이다(눅 23:56). 죽은 사람에게 향품과 향유를 바르는 것은 중동 지방 특유한 관습으로써, 헤롯 대왕이 죽었을 때도 그의 무덤에 향품이 놓였고, 오늘날에도 사마리아 지방에서는 애곡자들이 매장 후 며칠 동안 무덤에 찾아가 기도하는 관습이 존재한다.

이런 맥락에서 여인들이 향유를 바르기 위해서 아니라, 무덤을 “보려고” 찾아갔다는 마태의 진술은 매우 흥미롭다(마 28:1). 여기서 제 삼 일에 시체에 향유를 바른 것은 지중해 기후에 익숙한 독자 및 청중에게 적합한 표현이다.

특별히 율법이 안식일에 향유 바르는 것을 금지한다는 것을 잘 아는 유대 독자들에게 제대로 어울리는 묘사인 것이다. 53절의 묘사는 눅 19:30의 나귀에 대한 묘사와 유사하다: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 “아직 아무 사람도 타보지 않은 ….” 두 경우 모두 이전에 사용된 적이 없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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