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110강) 회중과 동일시되는 제자들 격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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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110강) 회중과 동일시되는 제자들 격려
  • 승인 2008.07.16 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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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들에 대한 긍정적 이미지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님은 사명의 완수를 위하여 최후의 전투를 벌이듯 그토록 간절히 기도하고 있었건만, 누가복음에서 제자들은 “슬픔을 인하여” 잠들어 있었다(눅 22:45). 그런데 마가와 마태복음에는 이 표현이 빠져있다(막 14:41-42; 마 26:45-46). 바로 여기서 우리는 제자들에 대한 묘사에 있어서 누가의 긍정적 의도면의 일단을 발견하게 된다.

즉 누가는 제자들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방울이 변하여 핏방울이 될 때까지 간절히 기도하는 스승의 아픔을 수수방관하는 것이 아니라 그로 인한 슬픔 때문에 잠든 것으로 묘사함으로써 마가복음의 부정적 이미지를 긍정적으로 바꾸어놓은 것이다.


이러한 긍정적 묘사는 수난기사에서 이외에도 여러 번 더 발생한다.

첫째로, 이 가운데 가장 의미 있는 부분은 주님이 체포될 때 제자들이 모두 그를 버리고 도망 친 사실의 생략이다.

마가와 마태복음에서는 주님이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산헤드린 공회)에서 파송한 무리들에 의해 주님이 체포될 때에 “제자들이 (모두)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고 기록되어 있다(막 14:50; 마 26:56). 헬라어 원문에 의하면 마가복음에는 제자들이란 단어가 없으나 마태복음에는 들어가 있어서 모두(all; pantes)의 주체를 분명히 하고 있다. 그런데 누가복음에는 제자들의 실패를 극명하게 드러내는 이 결정적 구절이 생략되어 있다.

주님이 체포된 후 이어지는 장면은 바로 대제사장의 집으로 바뀌는 것이다(눅 22:53-54). 한 마디로, 주님이 체포될 때 제자들이 비겁하게 스승을 버리고 도망친 것으로 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둘째로, 여기에 추가하여, 제자들의 실패를 완화 및 수정하는 또 다른 결정적 표현은 눅 23:49이다(“예수를 아는 자들과 갈릴리로부터 따라 온 여자들도 다 멀리 서서 이 일을 보니라.”). 이 구절은 주님이 십자가 위에서 마침내 운명할 때 그 광경을 목격한 사람들을 소개하고 있는데, 이 중 “예수를 아는 자들”이란 표현은 마가와 마태복음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막 15:41; 마 27:55-56). 거기서는 다만 갈릴리 여자들만 언급되어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이 “예수를 아는 자들”은 누구일까? 과연 저자 누가는 이런 표현을 통해 누구를 의도하였던 것일까? 문자적으로 볼 때 이 단어는 예수님을 ‘경험적으로’ 아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표현이다(hoi gnostoi). 그렇다면 주님을 경험적으로 안 사람 중 우리는 얼마든지 제자들을 포함시킬 수 있는 것이고, 이것은 결국 제자들이 주님이 십자가 위에서 운명하실 때 그 자리에 함께 하였음을 가리키는 표현이 되는 것이다.

이로써 누가는 스승 예수님의 부름을 받고 삼년 간 몸소 교육을 받은 제자들이 마지막 순간 비겁하게 모두 스승을 저버리고 도망친 배은망덕한 인물이라는 부정적 이미지를 완화시키고자 하였음을 발견하게 된다.

셋째로, 주님을 부인하게 된 베드로의 실패를 묘사함에 있어서 마가복음에는 “그저… 기억되어 생각하고 울었더라.”(막 14:72)라고 되어 있으나, 누가복음에는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눅 22:62)이라고 되어 있는데, 이는 자신의 실패에 대한 베드로의 회개를 더욱 부각하는 표현인 것이다.

이처럼 마가와 마태복음의 제자들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누가가 긍정적이고 호의적으로 바꾸게 된 것은 누가복음에서 회중과 동일시되는 제자들을 긍정적으로 묘사함으로써 선한 동기를 유발하고 그들의 신앙을 격려하기 위한 의도로 이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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