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92강) 부자 세리장 삭개오의 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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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92강) 부자 세리장 삭개오의 구원
  • 승인 2008.02.27 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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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 세리장 삭개오의 구원

돈 욕심은 믿음 없음의 증거

 

여리고 성의 세리장 삭개오 이야기(눅 19:1-10)와 그 앞에 기록된 소경 치유 사건(눅 18:35-43)을 이야기할 때 제기되는 질문 하나는 과연 주님이 여리고 성에 들어갈 때 소경을 만나 고쳤는지 아니면 삭개오를 만나고 난 후 여리고 성에서 나갈 때 그를 만났는지 하는 것이다. 마가와 마태복음에는 삭개오 사건은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부자 관원 사건과 연결되어 소경 치유사건은 등장하는데, 모두 여리고 성에서 나갈 때 주님이 소경을 만난 것으로 되어 있다(막 10:46; 마 20:29). 반면에 누가복음에서는 주님이 여리고 성에 들어가기 전 소경을 만난 것으로 나타난다(눅 18:35; 19:1).




그리하여 이 문제는 성경의 난제(難題) 중 하나로 종종 거론되기도 하는 것이다; 과연 어느 복음서가 맞는 것인가? 그리고 만일 우리가 둘 중에서 맞는 것을 찾을 수 있다고 하면, 그러면 다른 하나는 틀린 것이 되고 말 터인데, 과연 그것이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인가?

 

이와 같은 문제는 복음서를 순수한 역사적 기록인 전기(biography)로 보기 때문에 야기되는 것이다. 물론 당연히 복음서는 주님이 이천여 년 전 팔레스타인을 배경으로 하여 가르치며 행하였던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기록된 책이다. 그러나 그 사실(史實)을 기록한 책은 한 권이 아니라 네 권이나 되며, 그 안의 내용이 동일한 순서와 내용이 아니라는 점, 즉 같은 사건이라도 다르게 기록되거나 사건의 순서가 앞뒤로 바뀌었다는 것은 어느 한 복음서가 맞고 다른 복음서는 틀리다고 말할 수 없도록 만든다.


이 문제에 대하여 화란의 개혁주의 신약학자인 헤르만 리델보스는 하나님이 각 복음서기자들에게 해석의 자유를 주어 같은 사건이라고 할지라도 다르게 쓸 수 있도록 만드셨다고 주장한다.

 

그러면 이러한 관점에서 본문의 문제는 어떻게 해석될 수 있을까? 앞선 글에서 우리는 소경 치유 사건 전후로 두 명의 부자 이야기가 대조적으로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을 언급한 바 있다. 그리하여 눈 뜨기 전의 소경은 아직 재물에 집착한 나머지 영안(靈眼)이 어두운 부자 관원의 모습과 같고, 눈 뜬 후의 소경은 자신의 재물 전체를 기꺼이 포기하기로 결심함으로써 영안이 열린 삭개오의 모습과 같은 것이다.


이러한 구조를 위해서는 소경 치유사건이 주님이 삭개오를 만나기 전에 위치해야 함으로 누가는 다른 복음서와는 다른 변화를 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또한 기억해야 할 사실은 복음서의 기록된 사건들은 연대기적으로 배열되지 않았고, 따라서 부자관원 → 소경치유 → 삭개오 사건의 순서는 저자 누가에게 임하신 성령의 영감을 따라 이뤄진 것이다.

앞서 우리는 누가복음의 부자 관원 이야기가 마가, 마태복음과 다른 점 중 하나로 주님이 부자 관원에게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자에게 나눠준 후 자신을 따르라는 명령을 듣고 부자가 현장을 떠나지 않았다는 것을 지적한 바 있다(눅 18:23-24).


이 문제는 결국 누가복음의 배경이 되는 공동체 내에 재물에 집착한 나머지 구원의 기회까지 상실할 수도 있는 부유한 그리스도인들을 대상으로 하여, 부자 삭개오처럼 영적인 눈을 떠서 재물을 초월할 때 진정한 구원과 영생의 길에 들어갈 수 있다는, 목회적 권면으로 풀이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재물의 사용은 하나님 신앙의 결과로서 그 여하에 따라 그 믿음이 평가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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