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 차로 깨닫는 중용의 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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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 차로 깨닫는 중용의 덕
  • 승인 2009.09.30 2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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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 김정희는 찻자리가 도를 깨닫기 위해 中을 발전시키는 중용의 덕을 지니고 있다고 했다.

중용이란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말이지만 그 뜻을 정확하게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중용은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자기 자리나 분수를 지키는 것을 말한다. 어느 중국 철학자는 중용을 마치 체조 선수가 평균대 위에서 균형을 잡고 있는 것처럼 역동적이며 지속적인 평형을 말한다고 했다. 이에서 보듯 중용의 인생을 사는 것은 쉽지 않아 보인다. 왜냐하면 중용이란 단순히 숫자적이거나 기계적인 중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며 개별적인 상황에 따라 변수가 많기 때문이다.

때로는 나아가고 때로는 물러설 줄 아는 진퇴를 아는 것이 중용이요, 변화를 인정하고 그 변화에 맞춰 정확한 대안을 마련하는 것이 중용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루를 중용으로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의 선조들은 이러한 선택이 요구될 때 가루로 만든 말차를 마시며 조용히 세상을 관조하면서 운신의 폭을 결정하였을 것이다.

가루로 만든 말차가 부드러운 맛과 함께 집중(執中)하게 하는 덕을 지녔음을 차 생활을 통해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 크리스천의 생활에 있어서도 중용은 필요한 덕목이라 생각된다. 그러나 그 중용의 기준은 시대상황이나 환경, 자신과의 이해관계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 되어야 한다. 아무리 그것이 먹음직도 하고, 봄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게 보인다 하더라도 말씀과 거리는 있는 사안에 대해서는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는 신중함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그래서 크리스천이 택하는 중용은 우리 선조들이 선택하는 중용 이상으로 어려운 선택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되는 것은 우리는 이미 말씀을 통해 그 해답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장차를 위해 오늘의 풍요로움과 일시적인 만족을 잠시 유보함으로써 우리가 받을 상급은 우리가 결정한 선택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놀라운 것이 주어질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모세가 이집트 왕자라는 당대 최고의 자리를 박차고 하나님의 백성과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이집트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히11:24-26)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우리는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근심하는 자 같으나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라고 고백했는지 모른다.    


<한서대학교 대우교수·유아다례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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