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만강 다리에서 만난 탈북 소년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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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만강 다리에서 만난 탈북 소년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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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9.08.12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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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선창작동화] 김철수작가의 ‘꽃제비 사랑’
두만강 다리 위에서 내려다 본 강물은 하얀 거품을 뿜어내며 마치 죽은 물고기가 떠내려가는 것처럼 힘이 없었고 붉은색 구정물과도 같았습니다.

“아니, 두만강 물이 왜 이렇게 더럽지요?”

김 회장 일행의 안내를 맡은 여행사 가이드는 순간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습니다.

“이 곳은 두만강의 중간쯤 되는 지역이라 그렇고 조금 더 상류로 올라가면 거울처럼 물이 맑고 깨끗합니다.”

“그런데 이곳은 왜 이렇게 물이 흙탕물입니까?”

“네, 중간에 북한의 탄광에서 흘러나오는 폐수와 중국의 펄프공장에서 흘러나오는 폐수가 강물로 유입되어 이렇게 구정물이 된 것입니다.”

설명을 듣고서야 김 회장은 이해가 되는 듯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김 회장은 한국의 경상북도 안동에서 섬유공장을 운영해 오면서 한 때 ‘삼베 팬티’를 처음 개발해 1999년에는 섬유업계 최고의 영예인 한국섬유대상을 수상하고 대마 관련 제품 특허로 ISO 9001 인증까지 획득한바 있는 성공한 기업인입니다.

“우리나라 원로가수였던 김정구 선생이 부른 ‘두만강 푸른 물에 노 젖는 뱃사공’의 현장이 바로 이곳을 말하는 거지요?”

“네, 그렇습니다. 이 노래가 만들어져 불러지기까지에는 아름다운 사연이 있는데 혹시 아는 분이 계십니까?”

“잘 모르니 알려주세요.”

이번 두만강 일대를 둘러보기 위해서 온 김 회장 일행은 독실한 가톨릭 신자들로 이루어진 프란체스코 수도회라는 봉사모임의 신부님들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1930년대 중엽 극단 ‘예원좌’가 중국의 동북지방을 순회하면서 두만강변의 조그만 도시인 이곳 도문에 도착하여 조선 사람이 운영하던 여관에 머물게 되었는데 때는 늦은 가을이었고 여관의 뒤뜰에 단풍나무가 두 그루 서 있었는데 빨갛고 노랗게 물든 단풍나무는 집을 떠나 수만리 타국을 돌아다니며 순회공연을 하고 다니는 예원좌 극단 단원들의 향수를 달래주었습니다.”

“그럼 두만강 노래가 유랑극단 예원좌와 깊은 관련이 있다는 말이지요?”

성미 급한 김 회장이 여행가이드의 말을 가로질러 물어보았습니다.

“그렇습니다. 회장님께서는 눈치도 빠르시네요. 이 때 동행했던 작곡가 이시우 선생이 함께 있던 배우들과 고향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이 단풍나무는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던 해 여관집 주인이 고향을 떠나 두만강을 건너올 때 가지고 와서 애지중지 친자식처럼 심고 가꾸어 온 것이었습니다. 이 사연을 듣고 있던 작곡가 이시우 선생이 ‘추억’이라는 주제로 곡을 쓰려고 하는데 악상이 잡히지 않아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을 때 옆방에서 난데없이 여인의 통곡하는 소리가 들려온 겁니다.”

“여인의 울음소리가 한밤중에 들렸으니 모두 깜짝 놀랐겠군요.”

“그렇지요. 급히 여관집 주인을 불러 무슨 일인지를 물어보았더니 이 여인의 남편은 수년전 일본군과 싸우다 체포된 독립군이었는데 남편이 일본군에게 잡혀 있다는 소식을 듣고 두만강을 건너와 남편이 갇혀 있다는 형무소를 찾아가보니 이미 남편은 총살형을 당한 뒤였고 나라 잃은 슬픔에 왜놈의 손에 남편까지 잃은 여인은 마침 이 날 밤이 죽은 남편의 생일날이어서 여관방에서나마 제사를 드리다가 그만 슬픔을 참지 못하고 깊은 밤중에 울음을 터트려 대성통곡을 하게 된 것이라 했습니다.”

“정말 나라 잃은 민족의 슬픔이지요.”

“다름 날 아침 작곡가 이시우 선생은 두만강 변에 나가 북한 땅을 바라보며 서러운 내용의 가사에 즉흥적으로 곡을 붙여 ‘눈물 젖은 두만강’이란 노래를 만들게 되었고 ‘그리운 내 님이여’는 이 여인의 남편이기도 하지만 3천만 겨레의 빼앗긴 조국을 나타냈던 것이지요. 이렇게 급히 만들어진 노래는 다음날 극단 ‘예원좌’소속인 소녀가수 장월성이 부르기 시작했고 관중들로부터 떠나갈듯 한 박수와 환호로 몇 번씩이나 반복해서 부르게 되었는데 그 후 순회공연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온 이시우 선생은 시인 김용호 선생에게 가사를 다듬어 달라고 하여 이후부터 이 노래는 빠른 속도로 유행되었고 우리 민족의 심금을 울리는 국민의 노래가 된 것입니다.”

가이드의 설명이 끝나자 모두 약속이라도 한 듯 힘차게 박수를 쳐 고마운 마음을 표했습니다.

“나는 두만강을 여러 번 다녀갔지만 이런 사연이 있다는 것을 전혀 몰랐는데 이번 기회에 아주 중요한 것을 배웠습니다.”

김 회장 일행이 두만강 다리 중간쯤에서 아쉬운 발걸음으로 돌아서서 두만강 변을 거닐고 있을 때였습니다.

“아저씨 저는 북한에서 왔는데요. 우리 가족들이 모두 죽어가고 있습니다. 좀 도와주세요.”

김 회장 일행을 가로막고 손을 내미는 소년은 일명 ‘꽃제비’라고 불리는 탈북 소년이었습니다.

얼굴은 노인처럼 주름살투성이고 키는 초등학교 1학년 정도 밖에 돼 보이지 않는 소년이 내미는 손은 앙상한 뼈마디와 가죽뿐이었습니다.

“나이는 , 몇 살 이니?”

“열일곱 살 인데요. 제대로 먹지 못해 영양실조 때문에 자라지를 못했습니다.”

김 회장의 가슴에 뜨거운 그 무엇이 꿈틀거렸습니다. 한참 잘 먹고 자라야할 청소년들이 먹지 못해 저토록 말라 비틀어져 애늙은이가 되어간다고 생각하니 분노와 함께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너와 너의 가족이 굶지 않고 살려면 1년에 어느 정도 돈이 필요하니?”

“미국 돈으로 5백 달러만 있으면 리어카를 하나 사서 채소장사라도 할 수 있기 때문에 굶지는 않습니다.”

“선생님, 조그만 도움이라도 주시면 그 은혜를 평생 잊지 않겠으니 제발 도와주십시오.”

먹을 것이 없어서 북한을 탈출해 중국의 국경지대에서 중국 경찰들의 눈을 피해가며 관광객들을 상대로 동정을 구하는 탈북소년들의 눈동자는 늘 불안과 초조 속에 긴장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김 회장은 꽃제비 탈북소년의 손에 미화 500불을 쥐어 주었습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오늘부터는 저도 빌어먹지 않고 선생님처럼 기술을 배워 나중에 회사를 차려 다른 동포들을 도우며 살겠습니다.”

탈북소년은 붉게 상기된 얼굴로 김 회장 앞에서 다짐을 했습니다.

“그래, 네 말대로 무슨 기술이건 배워 스스로 모든 생활을 해결하고 더 나아가서는 다른 사람을 돕는 사람이 되길 바란다.”

이렇게 김 회장과 두만강변의 탈북소년 꽃제비의 만남은 시작되었습니다.

“신부님, 아무래도 저는 이곳에서 좀 할 일이 남아 있습니다. 한국에 돌아가는 일정을 늦춰야 되겠습니다.”

다음날 이곳을 떠나기로 예정되었던 김 회장은 함께 동행한 작은형제회 소속 신부님들께 말했습니다.

“무슨 일을 하시게요?”

“어제 만난 탈북소년의 말이 계속 귓가에 맴돌고 있습니다. 일을 하고 싶고 기술을 배우고 싶어도 그럴만한 환경이 되지 못하니 얼마나 안타깝습니까?”

“그럼 북한에 진출해서 그 곳에서 김 회장님이 직접 회사를 운영해보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이때부터 김 회장은 중국 땅에 섬유계통의 공장을 설립하기 위해서 모든 방법을 다 강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북한 땅과 가까운 두만강 강변에 땅을 빌려 대마를 재배하면서 북한을 오가며 사업을 하는 재중 사업가와 일본에 사는 재일동포를 통해 남북경제협력을 관장하는 북한의 민족경제협력위원회와 군부, 보위부 등에 평양에 섬유공장을 지을 수 있도록 허락해달라는 사업계획서를 쉬지 않고 보냈습니다. 이렇게 만 3년이란 세월동안 공을 들인 끝에 드디어 2002년 12월에 북한으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북한의 민간 경제협력 산하에 있는 새별총회사에서 사업제의를 받아들여 2003년 11월 국내최초로 평양 시내에 남북이 공동으로 운영하는 회사를 설립키로 하고 2006년 6월까지 완공을 목표로 공사에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그래, 이제야  두만강 변에서 만난 탈북소년과의 마음의 약속을 지키게 되었구나.”

김 회장은 너무나 마음이 뿌듯했습니다.

김 회장은 이메일을 통해 이 벅찬 기쁨을 한국에 있는 작은형제회 소속 신부님들께도 전했습니다.

김 회장을 아는 모든 사람들은 모두 축하의 박수를 보내주었습니다. 한국에 있는 기업이 약간의 지장이 있었지만 김 회장은 모든 힘을 평양에 건설할 공사에 쏟았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난데없이 북한 당국으로부터 공사를 중단하라는 일방적인 통고를 받게 된 것입니다.

“아니, 공사를 중단하라니 이게 무슨 일입니까?”

“글쎄, 저희들도 그 이유를 모르고 있습니다만 중앙당에서부터 내려 온 지시이니 중단할 수밖에 없습니다.”

김 회장의 동포 사랑하는 마음으로 시작된 평양공장 건설 중단은 날벼락과 같은 충격이었습니다.

나중에야 안 일이지만 북한의 일부 강경파들이 외부와 격리된 개성공단과는 달리 평양시내 한복판에 남한의 기업이 들어서면 주민들이 동요할 우려가 있어서 중단시켰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평양공장을 완공해야 합니다.”

김 회장의 노력으로 겨우 강경파를 설득해 2008년 말 평양공장을 완공하고 이제 본격적인 가동을 눈앞에 두게 되었는데 또 다시 어려움이 찾아온 것입니다.

북한의 핵실험과 함께 금강산 관광 중지, 그리고 개성공단 사태가 줄이어 터진 것입니다.

김 회장은 눈앞이 캄캄했습니다. 남한에 있던 공장도 평양공장건설로 인한 자금조달로 인해 압류를 당하고 평양에 건설한 공장은 모든 기계까지 다 준비해놓고도 가동을 하지 못해 한 달이면 1억이라는 돈이 적자가 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다행스럽게 이러한 사실이 신문에 소개되었습니다.

- 탈북소년 가여워 시작한 대북사업 -

- 빚 수렁에 빠져 남쪽 공장까지 압류 당해 -

김 회장의 ‘꽃제비 사랑’이 난데없는 북한의 핵 바람에 날아갔다는 소식이 신문을 통해서 전해지자 여기저기서 김 회장을 돕겠다는 사람들이 소식을 보내오기  시작했습니다.

“김 회장님, 우리는 북한에 고향을 둔 사람들입니다. 김 회장님의 뜨거운 동포사랑에 감사하며 지금 당하고 계신 어려움을 저희들과 나누어 지시면 충분히 극복하실 것입니다. 김 회장님 회사의 주식을 저희들이 사서 운영난을 돕겠으니 주식을 증자해주십시오.”

“김 회장님 실망하지 마십시오. 김 회장님은 절대 망해서도 안 되고 망하지 않습니다. 김 회장님의 공장에서 만든 제품을 저희들이 모든 사람에게 알려서 구입하도록 하겠습니다.”

슬픔과 실의에 빠져있던 김 회장에게 수 많은 사람들의 격려와 지원이 줄을 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김 회장의 사무실에 젊은 청년 한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이 청년은 김 회장을 보자마자 다짜고짜 엎드려 절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회장님, 우선 저의 절을 받으십시오.”

“회장님 저를 기억하시겠습니까? 제가 10년 전에 두만강 강변에서 회장님으로부터 도움을 받고 살아나 한국으로 탈북해서 이렇게 살아있는 꽃제비 소년입니다.”

김 회장은 어렴풋이 그 가엾던 탈북소년의 모습을 기억해냈습니다.

김 회장으로부터 10년전 두만강 변에서 도움을 탈북소년은 곧바로 북한으로 돌아가 김 회장이 마련해 준 돈으로 먹을 식량과 생활의 밑천인 리어카를 사서 생선과 채소장사를 하며 지내다가 3년 전 중국으로 탈출해 탈북자들을 돕는 단체의 도움으로 제3국인 태국을 거쳐 최근에 대한민국의 품에 안기게 되었고 국가로부터 생활교육과 정착금을 받아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되었는데 우연하게도 김 회장에 대한 신문기사를 읽고 급히 찾아오게 된 것입니다.

“자네, 그 때 이런 말을 했었지? 기술을 배워 빌어먹지 않고 남을 돕는 삶을 살겠다고.”

“회장님, 그렇습니다. 저를 회장님의 공장에서 일할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제가 기술을 배워 회장님께서 평양에 세우신 공장에서 일하는 것이 제 소원입니다.”

“좋네, 지금 당장은 평양공장이 가동을 못하고 있지만 다시 평양공장이 가동할 때는 자네가 꼭 그곳에 가서 일할 수 있기를 바라네.”
“회장님, 감사합니다. 회장님의 동포사랑이 언젠가는 남북의 평화통일을 이끌어내는 원동력이 될 것입니다.”

“그래, 나도 그렇게 믿고 싶네.”

탈북소년 꽃제비와 김 회장의 얼굴에 환한 해바라기 꽃이 활짝 피었습니다. 그리고 재정난으로 압류를 당했던 김 회장의 공장들도 다시 힘찬 소리를 내며 가동을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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