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검증] 생명과 죽음 주관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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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검증] 생명과 죽음 주관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도전
  • 이현주
  • 승인 2009.02.26 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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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엄사(尊嚴死)는 정당한 죽음의 방법인가? <하>
고영민박사<백석문화대 총장>


둘째로, 존엄사는 어떻게 시행되는가?

오리건주에서 행해졌던 존엄사의 실태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하다 은퇴한 뒤 평온한 노후생활을 즐기던 마크 고바야시(가명)씨가 몸에 이상을 느낀 것은 61세 되던 93년 3월, 병원을 찾은 그에게 내려진 진단은 대장암 말기. 즉각 수술을 받았지만 암세포는 이미 림프절까지 퍼져있었다. 길어야 2년 6개월 정도 삶을 연장할 수 있다는 것이 의사의 결론이었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고 병마와 더불어 초인적으로 싸운 결과 병세에 큰 호전이 있었다. 두 차례의 큰 고비를 넘긴 후 화학요법을 중단하고 경구용 모르핀으로 고통을 쫓아야 하는 막바지 단계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모르핀 과다 복용은 그를 거의 뇌사지경에 빠지게 했고 좌골신경에까지 암세포가 퍼지게 되었다.

의사는 마침내 ‘더 이상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선언하였다. 스테로이드 투입을 중단하자 구토가 시작되고 극심한 통증이 몰려왔다.

마크는 ‘너무 고통스럽다. 하루 빨리 이 지옥으로부터 벗어나고 싶다. 합법적인 자살을 하게 해달라’고 가족들에게 호소했다. 그러나 부인과 두 자녀는 한사코 반대하였다. 그렇지만 마크의 고통은 너무나도 심했다. 결국 부인은 합법적 자살을 도와주는 비영리단체인 ‘죽음에 대한 동정’에 건화를 걸었고 거기에서 의사들이 파견되었다. 그들은 50쪽에 이르는 마크의 진료기록카드를 살펴본 뒤 극약을 처방했다.

마크는 3월 어느 날 오후 가족들에게 둘러싸여 사과시럽이 섞인 달콤한 극약을 먹고 붉게 물든 저녁놀을 바라보면서 조용히 눈을 감았다.”

존엄사는 그 시행방법에 따라서 능동적 존엄사와 수동적 존엄사로 나누어진다. 능동적 존엄사는 위의 마크 고바야시씨의 경우처럼 고통을 피하기 위해 생명을 빼앗는 것이고 수동적 존엄사는 죽도록 내버려두는 것을 말한다. 존엄사는 자발적일 수도 있고 비자발적일 수도 있다. 자발적인 존엄사에서는 환자가 죽음에 동의하지만 비자발적인 존엄사에서는 그렇지 않다.

죽음은 자기 자신 때문에 초래될 수도 있고 다른 사람 때문에 초래될 수도 있다. 죽음이 자기 자신 때문에 초래되면 자살(suicide)이 되고 다른 사람 때문에 초래되면 타살(homicide)이 된다. 오늘날 대부분의 존엄사는 환자가 죽음을 선택하고 가족이 이를 보증하고 의사가 치명적인 의약품을 처방하는 것으로 진행이 되고 있다. 그 극약을 자기 손으로 복용하느냐 아니면 의사가 강제적으로 주입하느냐에 따라 스스로 자살한 것이냐, 의사가 의도적으로 타살한 것이냐가 판가름되어질 수 있다.

인위적으로 목숨을 끊는 능동적 존엄사와는 달리 죽도록 내버려두는 수동적 존엄사는 훨씬 바람직한 방법으로 평가되고 있다.

능동적 존엄사는 분명히 도덕적으로 잘못된 것이지만 수동적 존엄사는 생명을 유지시키는 자연스러운 수단(음식물이나 물, 공기 등의 정상적인 생명 유지 수단)을 유보하거나 회복이 불가능한 질병이 계속 진행되는 것을 억제하는 부자연스러운 수단(호흡기와 인공 장기 등의 기계장치)을 제거하는 것이기 때문에 권장할 만한 방법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든지, 부자연스러운 것이든지 간에 모든 존엄사는 결코 용납될 수 없는 심각한 범죄행위이다. 만일 불구로 태어난 어린 아기를 굶겨 죽기까지 내버려두었다면 누군가는 그것에 대한 책임을 반드시 져야만 할 것이다.

셋째로, 존엄사는 정당한 죽음의 방법인가? 이 세상에는 의학적으로 회복이 전혀 불가능한 말기 환자들이 수없이 많이 있다. 그들의 고통스러운 신음소리는 가족과 주변 사람들에게 적어도 한번쯤은 존엄사의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게 만들어 준다. 모든 수단과 방법을 다 써서 그들의 생명을 연장시킬 것인가, 아니면 그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어떤 극단적인 조처를 취할 것인가? 바로 여기에 존엄사의 이율배반적인 양면성이 있다. 그렇다면 존엄사는 정당한 죽음의 방법이 될 수 있을까?

첫째로, 존엄사는 생명과 죽음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대한 심각한 도전이다. 하나님은 만물의 창조자이시며 생명의 주관자이시다(창 1:1, 시 24:1). 오직 하나님만이 생명을 주실 수도 있고 빼앗을 수도 있다.

그러므로 존엄사는 하나님에게서 인간 생명에 대한 절대적인 주권을 빼앗으려는 패역한 시도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은 누구든지 죽어야 한다고 정해 놓으셨으며(창 2:16~17, 시 90:10), 생명에는 자연적 한계가 있다고 선언하셨다(시 90:10). 인공적인 생명 유지 수단은 오히려 죽음의 자연스러운 진행을 방해케 만들 수 있다. 하나님께서 정해놓은 생명의 한계에 맞서 싸우려는 것은 사실상 하나님께 적대하려는 행동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죽음이 찾아올 때 그것을 인위적으로 해결하려고 할 것이 아니라 그것에 기꺼이 순응하려는 신앙적인 마음가짐을 지녀야만 한다.

둘째로, 존엄사는 인간 생명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무서운 범죄행위이다.

인간의 생명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기(창 1:27) 때문에 신성하고 거룩하다. 인간은 하나님을 닮았으며 하나님께 대해 도덕적인 책임을 지니고 있다(창 2:16~17). 또한 인간은 하나님이 거룩하신 만큼 거룩해질 수 있고(레 11:44), ‘하나님 아버지가 온전하신 것처럼’ 도덕적으로 온전해질 수 있다(마 5:48). 인간 생명의 고귀성과 신성함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다른 인간을 살해하거나 저주하는 것을 철저히 금하셨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는 것은 간접적으로 하나님을 공격하고 무시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셋째로, 존엄사는 자살이나 살인의 한 형태이다.

십계명 중에는 ‘살인하지 말라’(출 20:13)는 계명이 있고 이를 어긴데 대한 처벌은 사형(출 21:12~13) 뿐이다. 자살도 살인의 한 형태이기 때문에 살인을 금지하는 명령의 적용을 받는다. 자기 자신을 죽이는 것은 생명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거부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생명의 고귀성에 대한 공격이다. 존엄사가 자발적이든지, 아니든지 간에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훼손하고 생명을 죽이는 치명적인 살인행위가 아닐 수 없다. 성경에 기록된 극소수의 자살자들은 하나님께로부터 강력한 책망을 받고 있다(삿 9:54~56).

넷째로, 존엄사는 가족과 사회로 하여금 범죄케 만든다.

사랑하는 사람의 생명을 유지시켜주는 인공 장기를 제거하려는 것은 가족들에게 무거운 죄책감을 가져다 줄 수 있다. 만일 그것이 가족들의 불가피한 사정, 예를 들면 경제적인 문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포기해야만 되는 경우에 있어서도 예외는 아니다. 그런데 한가지 유의해야만 하는 것은, 부자연스러운 생명 유지 수단을 계속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주관하는 자연스러운 죽음의 진행을 오히려 방해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생명의 연장을 가능하게 한 과학의 발전은 또한 죽음의 진행과정도 연장시키고 있다. 따라서 초기 단계에 생명을 유지시키는 기계를 장치할 것인지의 여부를 결정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나중에 기계장치를 제거해야 할 때에는 심각한 윤리적 딜레마를 빚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때 중요한 것은 환자에게 끝까지 최선을 다하려는 마음가짐이다.

요컨대 존엄사로 생명을 제거하는 것은 그 동기가 선한 것인가, 악한 것인가에 관계없이 도덕적으로나 신앙적으로 옳지 못한 일이다. 고의적으로 다른 사람이 죽도록 내버려두는 것도 올바른 행위가 아니다. 우리 인간에게는 생명을 거부하거나 끊을 수 있는 권리가 주어져 있지 않다. 존엄사를 주장하는 자들은 인간은 자신의 소유에 대해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는 사생활권이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생명은 사생활권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신의 생명을 자유롭게 주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존엄사를 주장하는 이유들 중의 하나는 그것이 환자의 고통을 덜어준다는 것이다. 그러나 존엄사는 육신의 고통을 덜어주기보다는 오히려 죽음의 고통을 더해 준다.

목적은 오로지 올바른 수단만을 정당화시킨다. 성경적인 견지에서 보면 고통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막아야 하는 악이 아니라 고상하고 끈기 있는 믿음의 인격을 형성시켜주는 원동력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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