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아인 크리스천들과 농아인교회에게 꼭 필요한 생활 매체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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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아인 크리스천들과 농아인교회에게 꼭 필요한 생활 매체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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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8.12.09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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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독농아인 대중문화 위해 농아인방송 운영하는 김진번목사

“장애인은 일시적인 구제의 대상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야 할 선교의 대상입니다. 때문에 그들이 지역교회 신앙공동체 안에서 차별 없이 교제하는 것이 성경적임을 일반 성도들이 알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기독교농아인 대중문화의 확산과 발전을 위해 기독교농아인방송(www.deafcbs.com)을 운영하고 있는 김진번목사(43세). 그는 중도에 청력을 잃어버린 중도실청 장애인으로 3년 전부터 안산온유한교회(김해곤목사) 농아부에서 방황하는 농인 영혼들을 구원하여 함께 생명수 포도밭과 같은 공동체 생활가정을 만드는 것을 목표로 사역하고 있다.


“처음에는 수화를 잘 모르는 구화인과 문맹인 농아인이 서로 의사소통이 되지 않아 힘든 점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수화교실과 한글교실을 통해 성경공부를 시작하게 되면서 농아인 성도들이 은혜를 받아 차츰 신앙의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 김진번목사(안산온유하교회 농아부, 기독교농아인방송)
그의 교회사역은 아직 시작단계로 자신의 장애를 극복하면서 교회 셀 모임을 통해 기도와 찬양, 교제로 농아인 성도와의 신앙적 관계를 유지해 가고 있지만 농아인 사역은 다른 장애인 사역보다도 더 많은 어려움이 있다.


“시각, 지체 장애인들은 대부분 사람과 사물과의 장애지만, 농아인(청각장애인)들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장애입니다. 이들은 청각장애로 손실된 부분을 커버하면서 부딪치는 어려움이 많이 있는데 농아인들은 청각에 의존하지 못하는 대신 시각에 많이 의존하게 됩니다. 저 역시 후천적 청각 장애로 눈으로 사람의 입모양을 보고 듣는 구화인이다 보니 상대방의 입모양이 작거나 입모양을 가리고 말을 하거나 너무 빠른 말로 이야기하면 도대체 무슨 말인지 몰라 의사소통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형편입니다.” 


엄밀히 말해 반은 정상인, 반은 농아인인 김목사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 농아인에게 다가가도 반쪽은 정상인이라는 핸디캡이 존재할 수 밖에 없다고 안타까움을 전하기도 했다.


“복음을 증거하다 보면 제가 중도실청 장애인이라는 것을 농아인들이 알아보고 거리감을 두고 대하는 경우가 종종 있어요. 그리고 농아인 목회자 모임에 가도 어릴 때부터 농아인이 아니었다는 것 때문에 그들의 인맥과 학연에서 가깝지 않은 거리감도 존재하고요.”


또한 중도실청 장애인인 그가 사역하면서 가장 고민이 되는 사항은 농아인들과 함께 지내지만 태어날 때부터 농아인으로 살아오면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던 그들의 삶을 다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김목사는 일반인 생활문화보다는 농아문화속에서 지내면서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죽을 힘을 다해 사역하고 있다고 고백했다.


“일반인 생활문화와 농아문화는 완전히 다릅니다. 그래서 소수문화가 존재하게 되는데 그들의 문화속에서 가능하면 생활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농화인문화에 동화되어서 활동하는 것이 농목회의 다짐이고 결단입니다.”


한국교회의 장애인선교에 대한 관심의 부족, 교회 안에 장애인 부서가 있다지만 자기교회에 그런 부서가 있는지도 모르는 성도들의 문제, 그리스도 안에서의 한 형제라는 지체의식이 부족한 것이 가장 마음 아프다고 말하는 김진번목사. 그는 교회가 장애인을 한 형제요. 지체로 인식하고 그들을 품어줄 때 교회는 자기모순을 극복할 뿐 아니라 예수님의 삶을 실천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장애인 성도들을 향한 사랑과 열정이 가득한 그는 고향인 경남 통영에서 고등학교에 다닐때까지만 해도 자신이 장애인이 될 것이라는 것은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갑자기 고열로 쓰러진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부터 청력을 잃게 되었죠. 저한테 이런 일이 발생할 줄은 생각도 못했습니다. 정말 죽고 싶은 마음뿐이었죠.”


고등학교 시절 청력을 상실한 그는 겨우 졸업을 했다. 하지만 소도시 통영이라는 낙후된 시골촌에서 사회복지 및 재활교육 시설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또한 들을 수 없다는 침묵의 세계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가야 한다는 것 때문에 거의 대부분을 골방에서 홀로 보냈다.


“후천적 청각장애인으로 살아가다 보니 텔레비전 소리는 물론이고 라디오, 그 외 안내방송 등 모든 것들이 들리지 않았기 때문에 공부를 하거나 기본적인 의사소통의 부재함 등 많은 고통과 힘든 여정이 뒤따르더라고요.”


자신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버린 사건 이후 그는 많은 방황의 시간을 보냈다. 그러던 중 23세 때 부산에서 의사소통의 문제로 폐결핵 치료를 제대로 받지 못해 길에서 정신을 잃고 쓰러졌고, 당시 부산 베데스다 선교회의 도움으로 부산의료원 입원치료 및 재활치료를 통해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다.


“당시 저를 도와주셨던 선교회의 목사님이 저에게 많은 도움을 주셨어요. 저의 병간호를 맡아주셨던 분도 그 교회 전도사님이셨고요. 그때부터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교회에서 생활하면서 그는 장애인들을 돕기 위해 소규모 시설 또는 장애인이 공동으로 생활하는 가정인 그룹홈을 통해 사회복지에 헌신하고 싶다는 꿈을 품고 신학을 전공하고 싶었다.


“그때 당시만 해도 저는 신학을 공부하면 사회복지사가 되어 고아원이나 그룹홈을 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는 줄 알았어요. 뭘 몰라도 한참 몰랐었죠.”


하지만 그는 장애를 안고 사는 사람이었고 비전을 실행할 수 있는 여건도 좋지 않았다. 낮에는 공장을 전전하며 직장생활을 하고, 밤에는 야학으로 공부를 해나갔지만 대학진학은 꿈조차 꿀 수 없었다.


“지금은 어떤 장애가 있어도 대학을 진학할 수 있었지만 당시만 해도 장애인이 대학에 진학한다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었습니다. 장애인이란 이유로 번듯한 직장도 얻을 수 없었고요. 그래서 공장을 전전하면서 생활하게 된 거죠.”


하지만 공장에서의 힘든 직장생활은 신앙생활을 제대로 할 수 없도록 만들어갔다.


그래서 그는 29세 때 ‘정말 이렇게 인생을 살면 아무것도 안되겠다’는 결심을 하고 독학사라는 대학졸업 검정시험에 도전하게 되었다.


“그때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내가 이 독학사 시험에 한 과목이라도 합격하지 못하면 주님의 뜻인 줄 알고 신학을 공부하겠다고요. 결과는 독학사 시험 낙방이었습니다. 그래서 평소에 꿈꾸어 온 신학을 하기로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래서 서울로 올라와 서울성경신학대학원대학교를 다니며 신학을 시작했지만 어려움도 많았다.


“가정 형편상 등록금 마련이 어려웠기 때문에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공부하면서 신학에 매달렸습니다. 잘 듣지 못해 공부하는데 어려움이 많았고요. 하지만 하나님께서 저의 발걸음을 인도해주셨던 것 같아요. 그리고 함께 공부하는 동기들도 옆에서 대필도 해주고, 서로 메모도 해줘서 공부하는데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갖은 어려움 끝에 그는 2004년 목회학석사로 학교를 졸업했으며, 지난 2007년에는 목사안수까지 받았다. 신학을 전공하면서 기독교농아인들을 위해 어떤 전문사역을 할 것인지 고민하게 되었고 장애인 그룹홈을 세워 장애인들과 함께 살고 싶어서 한국디지털대학교 사회복지학과에서 학업을 계속 이어가고 있다.

 
또한 지난 2003년 12월, 농아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통해 감동을 주고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체험할 수 있는 소통의 장을 마련하겠다는 비전을 품고 기독교농아인방송 사이트를 개설했다.


“일반인들은 다양한 방송매체를 통해 복음을 접할 수 있지만 농아인들은 방송매체를 접할 수 있는 방법이 별로 없습니다. 기독교농아인방송이 처음이 아닐까 싶어요. 전국 35만 명의 농아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시작한 일입니다.”


현재 기독교농아인방송은 청각 언어장애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수화컨텐츠를 제공하고 있다. 농목회자 수화설교, 수화성경, 손말큐티, 수화찬양, 수화교육, 농문화소식, 교계행사 등을 운영하면서 농아인 선교와 복지를 위한 사역을 전개하고 있다.


하지만 최근 재정적인 문제로 기독교농아인방송 사이트를 집에서 운영하고 있는 상황이다.


“무엇보다 방송 기자재를 구하기가 힘들어 현재 캠코더 위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이 사역을 후원해주시는 분들도 많지 않고요. 그래서 재정적인 어려움으로 중도에 포기할까도 생각했는데, 다시 하나님께서 주신 비전임을 깨닫고 사회복지사인 아내와 함께 사비를 들여가며 운영하고 있습니다.”


현재 그는 기독교농아인방송과 뜻을 같이해서 농아인 복음에 앞장 설 동역자를 기다리고 있다.


“동역자들이 생기고 사무실과 방송 기자재가 생기면 앞으로 기독교농아인방송을 이끌어갈 인재도 양성하고 국내 농교계 홈네트워크를 구축할 계획입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이 꿈을 이뤄주실 것이라 확신합니다.”


김진번목사. 그는 기독교농아인방송이 단기적으로 국내 최고의 기독교농아인 사이트이면서 동시에 농아인 크리스천과 농아인교회에 꼭 필요한 생활 매체가 되기를 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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