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 르포- 중] "사람 사는 곳은 어디나 똑같습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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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르포- 중] "사람 사는 곳은 어디나 똑같습네다"
  • 이현주
  • 승인 2008.11.18 20: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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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굽 운동화 쌍꺼풀 수술 유행...거리엔 군밤 가게 북적


 

평양에 봉수-칠골교회와 500여 개 가정교회 있어

식량사정 어렵지만 올해는 대풍에 한시름 놓은 듯


평양에 가기 전, 북한에 대한 선입견이 온통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었다. 이미 금강산 피격 사건으로 북한은 결국 적국이 아니겠느냐는 의혹과 경직된 분위기 속에서 3박4일이 흘러갈 것이라는 긴장감을 지울 수 없었다. 하지만 이번 공동기도회에 참여한 방북단은 여느 때보다 평안한 시간을 보냈다. 조선그리스도교연맹의 지극한 배려는 어느 한 사람 불편을 느끼지 않게 만들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평양의 모습은 수년전과 많이 달라져 있었다. 시내에는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의 모습이 많이 발견됐고, 차량의 통행도 부쩍 늘었다는 것이 이전에 평양을 방문했던 사람들의 증언이다. 11월, 평양은 어떤 모습일까.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와 북한 조선그리스도교연맹이 공동주최한 평화통일 남북 공동기도회를 통해 바라본 3박4일의 평양 방문기를 지난주에 이어 연재한다. <편집자 주>


# “사회봉사로 선교합네다”


공동기도회의 여운은 크게 남았다. 급한 일정으로 인해 마지막 인사도 제대로 나누지 못한 채 발걸음을 옮겨야 했던 남측 참가자들은 마음 한 구석에 남는 아쉬움을 지우지 못했다. 손을 흔들며 형제를 떠나보내는 북측 성도들의 눈물을 잊을 수가 없었다.

 
평양 평안군 수천읍이 고향이라는 예장 통합 이상선목사는 “고향땅에서 이렇게 다시 예배를 드리게 될 줄 몰랐다”며 “68년 만에 다시 찾은 고향을 보니 목이 메어온다”고 말했다.
 

사실 한국교회의 부흥을 주도하던 과거 평양의 모습은 지금 찾아볼 수 없다. 한국전쟁 당시 평양에 뿌려진 수많은 폭탄들은 도시의 모습을 폐허로 만들었다. 분명 시내 어귀마다 자리했을 교회의 모습은 아련한 기억의 흔적으로만 남아있다.

 
현재 평양에는 2개의 교회가 있다. 봉수교회와 칠골교회. 봉수교회는 예장 통합의 지원으로 웅장하게 세워졌고 칠골교회도 곧 감리교에서 재건축할 예정이다. 조그련 관계자는 2개의 교회 이외에 500개의 가정예배 처소가 있다고 설명했다. 동네마다 가정집에 모여 예배를 드리고 사회봉사를 한다고 말했다. 조그련은 그런 가정교회를 도우며 남측이 보내온 물자나, 각종 공장을 통해 생산된 자원들이 가정교회를 통해 지역사회에 나눠진다고 했다. 종교를 강요할 수 없는 북한의 제도에 따라 ‘사회봉사’를 통해 주민들의 마음을 변화시키고 그들 스스로 예배당을 찾을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조그련이 밝힌 북한의 성도수는 1만 3천 명 정도. 조그련은 남측교회처럼 ‘만사운동’을 벌이는 선교운동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 색깔옷을 입은 평양시내


북한 체제의 특성상 자유로운 관광은 꿈도 꿀 수 없다.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방북단은 조그련이 정해놓은 일정에 따라야 했다. 안내원이나 접대원 이외에 일반 시민들과 대화를 나누는 것은 불가능했다. 아직도 북한은 상호 감시체제로 유지되고 있고,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게 되면 어느새 뒤따라와 가까이에서 귀 기울이는 사람들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버스를 타고 다니며 차창 밖으로 보여지는 풍경 속에서 평양의 일상을 엿보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놀라운 것은 평양 시내에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이 많아졌다는 점이다. 중국의 어느 한 도시처럼 평양시내에는 자전거를 주요 교통수단으로 이용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출퇴근 길, 도로가에 자전거를 세워놓고 담배를 피워 문 평양 시민의 모습을 흔히 볼 수 있었다.

 
아침 등굣길에 나선 아이들의 모습을 여느 나라 아이들과 다를 바 없었다. 어른들의 옷차림이 무채색의 점퍼 일색이라면, 평양을 알록달록 수놓은 것은 아이들의 옷차림이었다. 우리네 아이들이 어깨에 메는 가방과 단정하게 신은 반 양말, 삼삼오오 수다를 떨며 학교로 향하는 모습이 활기차게 느껴졌다.
 

평양을 처음 바라본 기자의 눈에는 온통 콘크리트 빌딩만 가득한 평양의 모습이건만, 이미 8년 전 평양에 온 적 있다는 한 참가자는 “평양이 색깔 옷을 입었다”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8년 전 평양시내는 온통 회색빛이었어요. 그때 북측 사람에게 당신들은 페인트도 없냐고 물었었지요. 그런데 지금은 희미하나마 건물마다 채색이 되어 있고 전기 사정도 훨씬 나아진 것 같습니다. 해가 진 이른 저녁이면 평양은 깜깜했는데 지금은 불빛이 가득하네요.”
 

전기 사정이 나아진 것은 최근 평양 인근에 전력소가 세워졌기 때문이다. 수시로 정전이 되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지만 평양 시내가 깜깜한 밤에도 불을 밝히고 있다는 것은 확실한 변화였다.


# 통굽 운동화 유행


평양에도 유행의 바람이 불고 있었다. 유행은 어디나 그렇듯 젊은 여성들에게서 가장 먼저 감지됐다. 10대의 학생부터 20대 후반의 여성들까지 키높이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앞뒤 모두 굽이 높은 통굽신발은 이미 우리나라에서 유행이 지나간 지 오래다. 다만, 우리는 다양한 형태의 키높이 신발들이 유행을 갈아타고 있다. 그런데 평양에는 검정색 키높이 운동화가 대세였다. 외부 손님을 많이 대하는 접대원과 안내원들의 얼굴에도 변화가 있었다. 그것은 ‘쌍꺼풀 수술’로 예뻐지고 싶은 여성의 욕망은 사회주의 국가에서도 예외가 없나보다.

 
거리에는 겨울철 간식을 파는 ‘군밤-군고구마’ 간판이 눈에 띠었다. 거리 판매대에서 청량음료와 군밤 등 군것질거리를 파는 모습이 정겨웠다. 저녁 6시 퇴근시간이 되자 ‘평양맥주’ 집에는 손님들이 가득했고 어느 골목에선 사람들이 길게 늘어선 모습도 보였다.
 

‘재미난 영화라도 하는 것일까’ 길게 늘어선 행렬이 궁금했다. 조그련 관계자는 “배급을 타는 행렬”이라고 말했다. 계란 같은 부식들을 받으러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는 모습에서 사회주의를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다.


# 북의 도서관 인민대학습당


둘째 날 둘러본 곳 중에는 인민대학습당이 있었다. 이곳은 우리로 치면 국립도서관으로 장서 3천만 권을 보관할 수 있으며 현재 2500만권이 소장되어 있다. 열람실만 600개에 이르며 특이한 것은 200명의 강사가 포진되어 있어 공부하던 학생들이 모르는 것이 있을 경우, 문답실에서 수시로 해답을 얻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외국어 학습당에서는 영어 수업이 한창이었다. 외국어 수업은 근로자를 대상으로 6개월 단위로 수강할 수 있다고 했다. 대학생들은 영어로 전공과목을 번역할 수 있는 실력을 갖춰야 졸업할 수 있기 때문에 별도의 외국어 수업을 받을 필요는 없지만 교육의 기회가 부족한 근로자들은 누구나 원하는 강좌를 들을 수 있다고 말했다. 열람실의 학생들의 모습을 지켜보니 우리의 70년대를 연상케 했다. 하얗게 반들거리는 우리의 백색 형광지 노트나 책은 찾아 볼 수 없었다. 아직 갱지 수준이지만 이것도 수년전에 비하면 엄청나게 좋은 재질의 노트라고 했다.
 

5년 전 인민대학습당을 견학한 기장 전 장로부총회장 송영자장로는 “까끌까끌한 갱지에 글을 쓰는 모습이 무척 안타까웠는데 그에 비하면 지금은 엄청나게 좋아졌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북측 관계자는 “남측에도 이런 규모의 도서관이 있느냐”고 물었다. 평양의 자랑거리인 인민대학습당은 사실 우리의 국립도서관에 비할 바 못됐다. 우리는 대학마다 장서를 소장한 도서관들이 있고 지역별로 도서관이 세워져 있다고 설명했다.


# 초등 3학년부터 영어교육


북한도 최근 들어 교육열이 높아지고 있다. 외국어 교육 강화를 위해 소학교(초등학교) 3학년부터 영어를 필수적으로 배운다. 같은 버스에 탔던 조그련 관계자는 “딸아이가 전교에서 1~2등을 놓치지 않는다”며 자랑을 늘어놓았다. 아이들이 재능을 보이는 것은 모든 부모에게 기쁨일 터. 7일 탁아소에 보내며 키웠던 아이가 초등학교 3학년이 되어 제 실력을 발휘하는 모습이 아비의 마음을 흡족케 하는 듯 했다.

 
북한은 노동인력 확보를 위해 탁아소와 유치원을 운영한다. 탁아소는 하루만 맡기는 1일 탁아소와 일주일 단위의 7일 탁아소, 그리고 10일 탁아소가 있다. 출산휴가가 6개월인 북한의 여성들은 생후 6개월부터 아이를 맡길 수 있다. 아이가 탁아소에 맡겨지면 부모의 배급량은 아이의 먹거리만큼 줄어든다.
 

재미난 현상은 북한 역시 외할머니들이 육아를 도맡아 한다는 사실이었다. 여성의 은퇴시기가 55세이기 때문에 가까이 살면 대부분 외할머니에게 아이를 맡긴다고 했다. 국가에서는 다출산을 장려하지만 북한에도 자녀 한두명만 낳는 저출산 바람이 불고 있고 남아보다 키우기 수월한 여아를 선호하는 모습도 감지됐다.


# 겨울 앞둔 ‘김장전투’


벼를 베어낸 논에선 볏짚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가을걷이를 끝낸 논밭 이외에 눈에 들어온 것은 푸른 배추들. 곳곳에 심어진 배추를 보니 겨울이 성큼 다가왔음을 느낄 수 있었다. 비료 사정이 좋지 않은 북녘의 배추는 속이 텅 빈 앙상한 모양이었다.

 
거리에는 포대자루에 무와 배추를 가득 담아 등에 지고 가는 아낙들의 모습이 보였다. 먹고 살기가 고단한 것은 평양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특수 계층들이 살고 있다고는 하지만 거리 곳곳에서 힘든 삶의 흔적들을 찾을 수 있었다.

사흘이 지나고서야 조심스레 북측 인사에게 북한의 식량사정을 물었다. “국제사회에서 북한을 다녀 간 뒤에 식량사정이 무척 안 좋다고 보고했는데 지금 먹고살기는 어떤가요?”

 
민족화해협의회 관계자는 민감한 질문도 아무렇지 않은 듯 북한이 실제로 어려움을 겪었다고 대답했다.

“많이 어려웠는데 그래도 올해는 풍년이 들어 한 시름 돌릴 것 같습네다. 탈곡을 마쳐봐야 알겠지만 지난해보다 나아질겁네다. 그런데 남측은 어떻습네까?”

 
사실 일조량이 풍부하고 별다른 태풍피해가 없었던 올해 날씨는 남과 북 모두에게 풍년을 선물했다. “우리도 농사가 참 잘됐답니다. 과일도 풍작이고...” 더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방북 전 뉴스에 보도된 우리의 현실은 풍작에도 불구하고 과일을 밭에 버려두고 갈아엎는 웃지 못 할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차마 먹는 것을 손익이 안 맞아 버린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같은 민족은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리는데 우리는 남아서 버린다니 참으로 죄스러운 마음이었다.
 

민화협 관계자는 이어 우리 정부가 인도주의적 지원을 중단한 것에 대해 불만을 성토했다. “같은 민족인데 좀 도와주면 어떻습네까. 생판 얼굴도 모르는 아프리카에도 국제원조를 하는데 북측에 주는 것은 왜 그렇게 인색합네까. 한 민족이고 모두 형제 아닙네까.”

 
맞는 말이다. 새정부 들어 인도주의적 지원마저 끊겼고 국내 종교사회지도자들이 북한의 식량사정을 이야기하며 정부의 쌀 지원을 촉구한 바 있다. 하지만 민간지원 이외에 정부차원의 지원은 아직까지 이뤄지지 않고 있다.


# 자주 만나야 변하지요


사실 질문을 할 때도 조심스러웠지만 북측에서 식량사정을 터놓고 이야기할 줄 예상 못했다. 자존심을 목숨처럼 여기는 북한에서 “어려웠다. 왜 안 도와주느냐”고 말한 것은 놀라운 진전이었다.

 
북측 관계자들은 수시로 남측과 교류가 중단된 것에 대해 불만을 드러냈다. 새정부가 북한과 계속 대화할 의지가 있는지도 물었다. 하지만 북측을 볼멘소리와 달리 새정부 들어 민간교류는 더 늘어났다. 정부가 북한을 향해 부동자세를 취하고 있긴 하지만 통일교육원 통계에 따르면 올 1월부터 9월까지 방북인원은 전년에 비해 훨씬 더 많이 늘었고 사회문화 교류 및 지원 활동도 13.4% 증가했다.
 

교육원 관계자는 “남한의 지원이 북한의 생활환경을 변화시키는데 큰 도움을 준다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민간교류가 증가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북한은 정말 변했다. 그 곳이 비록 북한의 중심도시 평양이라 할지라도 변화는 긍정적인 것이다. 이번에 평양을 방문한 교회협 관계자들은 북한의 변화에 대해 교류의 결과라고 입을 모았다. “어디에 분배되는 지 알 수 없다”며 의심하지만 지난 수년간 북한은 우리의 도움을 받았고 이미 사람들은 남북의 경제적인 격차를 인식하고 있음에 틀림없어 보였다.
 

잘 차려입은 방북단이 개선문 앞에서 안내원의 설명을 듣고 있을 때면 사람들은 웃으며 우리에게 손을 흔들었다. 연간 수천 명의 남한 사람들을 맞이하는 평양 시민들에게 우리의 모습은 그다지 낯설지 않았을 것이다. 낯설지 않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의미는 충분하다.

 
보고 나니 선입견을 깰 수 있었다는 감리교의 한 목사는 “좌와 우를 구분한다면 나는 우에 더 가까운 사람이에요. 하지만 이번에 평양에 온 것은 참 잘한 일 같습니다. 아직 북한 주민들이 주체사상을 종교처럼 신봉하며 살아가는 모습이 마음 아프긴 하지만 남과 북이 자주 만나고 교류하는 것은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얼굴도 보지 않고 사랑할 수 없는 법. 통일을 위해서 우리는 자주 만나야 한다는 너무나 기본적인 교훈이 일행들의 가슴에 새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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