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잃은 한국교회…‘탐욕’버리고 자신을 비워야
상태바
희망잃은 한국교회…‘탐욕’버리고 자신을 비워야
  • 운영자
  • 승인 2008.10.22 14:0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종교개혁의 달에 부쳐 - “한국교회, 개혁을 말해도 되는 것인가?”
▲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다시 세워진 교회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경직되고 도구화되고 말았다. 그림은 1521년 보름스 국회.

이성구교수<고려신학대학원>


주류교회, 개혁 외침에 무반응…개혁세력도 초기 출범 취지 점차 쇠퇴

세상의 권력 기관으로 인식되는 교회모습, 섬김과 낮아짐으로 변화돼야


다시 종교개혁을 생각해야 하는 시점이 돌아왔다. 마틴 루터와 함께 기억되는 10월 31일이 다가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찌된 셈인지 더 이상 교회의 개혁을 언급한다는 것이 어색하고 심지어는 겁이 난다. 이때가 되면 어김없이, 쉬지 않고 말해 온 교회의 개혁 문제가 세월이 갈수록 개선이 되기는커녕 갈수록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고 개혁을 주장하는 사람들만 미운 털이 박히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우선 지금 당장 벌어지고 있는 교회의 문제점들을 살펴보라. 감리교는 현재 사상 초유의 두 감독회장 시대를 맞고 있다. 세상법정까지 끌고 가서 얻은 결론과 총회의 결론이 동일하지만, 선거관리위원회가 시행한 실제 선거결과는 전혀 다르게 나타나 감리교회는 지금 완전히 갈라져 있다. 좀처럼 분열하지 않는 것으로 자부심을 삼던 감리교회의 형편이 말이 아니다.

장로교 합동측 총회가 파송한 이사회는 임기 끝난 총장의 후임조차 제때에 선출하지 못할 만큼 지리멸렬하다. 수차례 회의를 하고 한 자리에서 4번의 투표를 하고서도 결론을 내리지 못하는 파벌정치의 폐해를 보여주고 있다.

장로교 고신총회는 관선이사 파송이라는 수모를 겪고 회복한지 겨우 1년여를 넘긴 시점에 다시 투서와 진정이 난무해 현재 교육부가 특별감사를 파송해 두 주간에 걸쳐 샅샅이 뒤지고 있다. 기독교장로회는 총회가 사들이고 직영하는, 한 세대 역사를 담당했던 ‘수유리 아카데미’가 호텔로 변신한 후 주일에도 장사를 할 뿐 아니라 점점 소위 ‘러브호텔’화 하는 것 아니냐는 비판에 직면하여 쩔쩔매고 있다.

순복음 교단이 분열을 딛고 다시 통합을 도모하고 있다는 고무적인 소식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침례교 신학대학의 총장을 둘러싼 소요, 초교파 신학교로 알려져 아시아연합신학대학에서 벌어지고 있는 총장과 교수들의 극단적 대치상황 등 교단, 신학대학, 찬송가공회와 같은 연합기구 등 가릴 것 없이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분열과 이권다툼이 시시때때로 벌어지고 있다.

오늘은 조용해 보이지만 언제 다시 한바탕 전쟁 상황으로 돌입할지 아무도 알 수 없다. 개 교회들을 들여다보면 교파를 가릴 것 없이 어지럽기 짝이 없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기업을 물려주듯 당회장의 자리를 이어가게 하는 소위 ‘세습’은 더 이상 논쟁거리도 되지 않는다. 세습의 형태도 발달하여 수많은 간접적인 방법까지 동원되고 있어 할 말을 잃게 한다. 이런 한국교회를 두고 과연 주님의 교회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일까?

교회의 한 편에서 끊임없이 ‘개혁된 교회의 지속적인 개혁’을 말하고, 연합과 일치를 외치고, 정결한 교회로 거듭날 것을 촉구하지만 그야말로 소귀에 경 읽기에 불과하다.

주류교회가 주변부의 개혁을 향한 부르짖음에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자, 조직적으로 교회 개혁운동에 나선, 출발이 신선했던 ‘교회개혁연대’와 같은 제3의 세력들은 점점 극단적으로 치달아 이제는 그들의 활동이 교회를 위한 것인지, 아니면 아예 교회를 해치자는 것인지 구별이 안 될 정도로 파괴적인 모습을 보이기까지 한다. 이래저래 한국교회는 점점 희망을 잃어가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개혁은 정치제도와 지도자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주님의 교회는 당연히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중심이 되고 주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야 한다. 그런데 주님 중심의 교회가 되는 가장 빠른 길은 바울 사도와 같은 선포를 할 수 있는 지도자들이 나타나는 것이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전 11:1). ‘나는 바담 풍 해도 너희는 바람 풍 해라’는 우스개 소리처럼 지도자가 성경대로 살지 않으면 교회가 바르게 설 수 없는 것은 자명하다.

중세 종교개혁이 발생한 이유가 어디 있는가? 물론 사람마다 여러 가지로 다르게 설명할 수 있겠지만 압축해서 말한다면 교회가 성경적 원리를 중심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세월을 따라 만들어 낸 교회의 전통과 제도가 중심이 되면서 필연적으로 일어난 사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교회는 필요에 따라 교황을 바울의 후계자로 추앙하고, 교황을 정점으로 하는 중앙집권적 정치제도를 성경적이라고 주장하고, 연옥설, 교황 무오설, 마리아 승천설이니 하는 새로운 교리도 만들고, 구원을 위해 필요이상으로 공적을 세운 사람들의 남은 공적을 부족한 사람에게 나누어 줄 수 있다는 ‘공적설’ 등을 유포해 베드로 성당을 짓는 자금을 구하려고 하니, 점점 성경적 원리와는 거리가 멀어질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종교개혁 이후의 역사를 자세히 살펴보아도 역시 교회는 끊임없이 중앙집권화의 유혹과 저항을 반복하고 있다. 중세이후 독일을 비롯한 유럽의 교회들이 교황의 통치에서는 벗어났지만 여전히 국가교회로 존재하며 교리적으로 통제당하는 분위기를 느끼게 되자 ‘자유교회’ 운동이 곳곳에서 일어났다.

국가교회가 존재하는 곳에는 소위 ‘free church`가 생겨나 있음을 볼 수 있다. 루터의 다음 세대라고 할 수 있는 칼빈의 개혁운동은 사실상 제도개혁 운동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개혁자 루터가 아니라 칼빈을 따라 개혁교회, 장로교회가 생겨난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바른 교리는 반드시 그것을 담을 수 있는 바른 틀을 필요로 한다.

1,500년 동안 이어진 교회의 제도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경직화되고 도구화되고 비성경적인 요소가 포함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시대를 따라 제도와 관행을 다시 검토하고 재구축하는 작업은 피할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칼빈이 성경 연구를 통하여 교회의 교리에 성경적으로 문제가 있음을 밝혀가자 자연스레 교황을 정점으로 하는 중앙집권적 정치제도에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다. 교황제도에 대한 성경적 근거가 없음을 밝히게 되면 교회는 더 이상 교황을 필요로 하지 않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상식적으로 로마교회와는 다른 구조의 교회가 탄생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현재 한국교회 각 교파가 문제에 휩싸이는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한국의 장로교회의 흐름에서 보듯이 교회가 점점 중앙집권화 되면서 문제가 폭발하고 있다. 중앙집권화는 거대한 조직을 필요로 하게 되고, 따라서 총회 기간 동안의 사회자일 뿐인 총회장의 자리가 1년 내내 상시조직의 장으로 변질되고, 섬김과는 상관없는 권력의 자리로 비쳐지게 되어 금권 타락 선거라는 말이 나온지 오래 되었다.

성서공회, 기독교서회, 기독교방송, 찬송가공회 등 교회의 연합기구조차 수시로 이권다툼에 휘말려 볼썽사나운 모습을 자주 드러낸다. 힘과 돈이 한 곳으로 모이니 자연히 문제가 발생하고 교회의 영광이 엄청나게 훼손되고 있다.

제도의 변화는 결국 리더십의 변화를 요구하고 지도자의 변신을 강요하게 된다. 통제하는 지도자가 아니라 섬기는 지도자는 혁신적인 제도의 변화가 뒷받침되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다. 교회의 제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통제나 군림이 아니라 철저하게 섬김을 위한 도구로 변화되어야 한다. 끊임없이 바꾸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

오늘 한국교회가 갖고 있는 가장 문제는 교회가 힘이 있는 조직으로 비쳐지는 것이다. 교회는 힘을 가진 하나의 인간 집단이 아니다. 교회가 힘이 있다는 그것은 오직 섬김을 위한 수단일 뿐이다.

그런데 갈수록 교회는 세상에 권력기관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러니 세습이니 뭐니 소리가 나고 교회에 대한 사회의 질시가 쏟아지고 있는 것이다. 마치 권력을 쥔 여당이나 정부처럼 세상의 비판에 직면하고 있다.

왜 이렇게 교회가 섬김이 아니라 군림의 기구라는 어이없는 인식을 심어주게 되었는가? 결국 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우리의 탐욕 때문이다. 영광스러워야 할 하나님의 교회가 세속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은 인간의 인격과 존엄성을 갉아먹는 탐심에 기인한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골로새서 3:5)

그렇다. 아담과 하와를 무너뜨린 탐심은 역사에 두고두고 문제를 일으켜왔다. 탐심에 사로잡히면 하나님의 자리도 차지하려 한다. 탐심은 우상 숭배와 비슷하거나 동일한 결과를 빚는다고도 하지 않고, 탐심은 우상숭배 그 자체라고 말하는 것은 가히 충격적이다. 오늘날 어느 개혁교회 전통을 가진 지도자가 자신이 우상숭배를 하고 있다고 인정하겠는가? 그러나 성경은 명명백백하게 탐심은 어떤 종류이든 우상숭배라고 못 박고 있다. 예외가 없다.

한국교회는 탐욕을 버려야 한다. 철저하게 자신을 비워야 한다. 예수님의 자리에 나란히 서야 한다. 주님은 보좌를 버리고 사람의 형체를 가지실 만큼 철저하게 낮아졌음을 머리로가 아니라 몸으로 익혀야 살 길이 생길 것이다.

한국교회가 다시 주께 쓰임을 받을 수 있는 다른 무슨 길이 있을까. 아니, 한국교회에 이런 식으로 개혁을 논의할 여지는 남아있는 것일까.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