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복음운동과 영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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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복음운동과 영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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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8.10.09 1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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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엽목사<기독교정화운동 대표>

민중신학자 서남동 교수가 민중신학운동을 펼쳤던 근본적인 이유는 청계천에 갔다가 천막속에서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입지도 못하는 가난한 사람들의 정경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리스도께서 가난한자와 병신들과 앓는 자, 누워있는 자들과 먹지 못하는 자들에게 각별한 애정을 표시했던 이유를 어렴풋이 알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민중신학 해방신학은 한 인간으로써의 가치를 도둑맞지 않게 보호하고 그들의 삶을 예수의 정신으로 돌보자는데 의미가 있다. 그래서 많은 사회적 복음의 의미를 재고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사회복음운동은 타당성을 갖는다. 이런 의미에서 김영한 박사는 사회복음의 외연까지를 넓힌다는 뜻에서 문화신학을 펼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언뜻 이해하고 있는 사회복음은 결국 인권운동 쪽으로 혹은 복지운동 쪽으로 각별한 힘을 쏟는 것이 현실인 바 이에서 잘못하면 하나님에 대한 관계가 희미해질 수도 있다는 위험성 속에 노출 되는 것이다.

대부분의 운동들이 그렇듯이 기도할 시간도 없고 틈도 없는 것이 사회운동들이다. 이이 대하여 김달수 박사는 이미 사회복음은 하나님을 잃어버렸다고 진단 하였다.

이제까지 사회운동은 가난한자 병신들을 위하여 투쟁함으로써라야 그 진정성을 확보할 수 있었고 또 성격상 그렇다. 누구나 이런 약점을 갖고 있는 분야에 눈을 돌리기를 소홀이 하는 것이다. 정치문제 경제문제 외교 국방 문제들도 화급성을 요하는 문제들이고 기타 큰 문제들이 산더미처럼 다가오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서 있음이 곧 기도였고 다니심이 치료였으며 외치심이 곧 하나님의 뜻이었고 손을 대시는 것이 곧 약한자들을 돌보심이었고 눈을 뜨심이 죄인들을 영접 하심이었다. 이것이 곧 그의 계시적 행위였다(요12:49-50).

리차드 포스터는 이렇게 말한다. 만일 우리가 바쁜 핑계를 대고 하나님과의 신령한 관계를 소홀이 한다면 그래서 신령한 영성 관계를 상실한다면 우리는 예의 가난한자들, 억울한자들, 굶는 이들을 육신적으로는 구제할지 모르나 결국은 그들의 영혼 속에 절망과 불신앙으로 인한 상실의 존재감 밖에는 더 주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없는 구제나 복지가 인간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라고.

백번 옳은 말이다. 리차드 포스터의 생수의 강을 읽고부터 나는 사회복음에 더욱 친근감을 갖게 되었다. 으례 사회복음 운동가들이란 몽둥이를 들고 때리고 부수며 최루탄을 맞다가 다 끝나고 나면 술 한잔씩을 하는 것으로 인식했던 나에게 영성 운동가 포스터의 신앙 고백적 논지는 새롭게 사회복음 운동에 대한 친밀감을 갖게 해 주었다.

오늘 날은 영성의 시대라고도 할 수 있다. 영성이란 한마디로 말한다면 성경과 성령을 통한 하나님과의 관계성이라고 정의하면 좋으리라고 생각한다. 이름만 있고 관계가 소원해진 신앙은 무신앙과 다를 바 없다. 진정한 영성을 상실한 모든 사회운동은 마르크스 주의나 일반 사회운동과 구별할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을 상실한 무신앙적 영성이나 혼합주의적 영성을 주장함으로써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관계나 그로 인하여 파생되는 무영성적 모든 무신앙의 사회복음을 재고 하여야 한다. 그래서 그리스도와의 살아있는 관계의 사회복음 운동을 강화하여 그리스도의 인휼의 복음을 이 땅에 펼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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