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사는 삶’ 지향하는 존재론적 선교 모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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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사는 삶’ 지향하는 존재론적 선교 모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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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8.10.01 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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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수일교수<한신대학교 선교학>


선교는 교회의 성숙한 성장과 개혁에 기여해야 한다. 그러나 오늘 한국교회의 선교가 교회의 성숙한 성장과 개혁에 도움이 되기보다 오히려 교회의 위기를 심화시키고 있는 것이 유감스럽게도 현실이다. 선교가 교회의 일치와 증언의 신실성을 뒷받침하기보다 교회를 분열시키고 증언을 불신하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성장둔화 혹은 정체기를 맞은 한국 개신교의 선교는 더더욱 물량주의에 근거한 공격적인 교인쟁취에 빠져 들어가고 있는 것 같다. 선교가 교파간의 분열은 물론 ‘부자교회’와 ‘가난한 교회’로 교회를 양극화시키는 현실이 그것을 반영한다.

해외선교도 마찬가지다. 해외 교민교회의 끝없는 분열과 상호배타성은 물론 현지 선교지에서의 문화충돌, 공격적인 자본주의시장경제에 편승한 선교태도, 선교사들 상호간의 불신, 파송 기관 혹은 후원교회와 선교사의 관계에서 제기되는 갈등과 선교비 문제 등은 선교가 교회를 개혁하기보다는 교회의 정체성을 도리어 혼란스럽게 만드는 것이 아닌지 당혹스럽기 짝이 없다.

선교는 교회의 가시적 일치를 지향해야 한다. 그리고 그런 일치는 ‘상하적 일치’가 아니라 ‘평등한 일치’여야 한다.

그렇다면 어디에서부터 선교의 위기가 비롯된 것일까? 나는 이 위기가 선교신학의 부재에서 왔다고 생각한다. 선교신학의 부재는 선교를 좁은 의미에서의 전도, 다양한 성장 프로그램으로 이해하는데서 온다.

그러나 선교는 프로그램 개발의 문제가 아니다. 만일 선교가 프로그램이라면 인적 자원과 돈이 없는 교회는 선교를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선교는 사업을 통해서가 아니라 존재로 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요 빛이다’(마 5:13-14)라고 말씀하신 것은 선교를 사람이 할 수 있는 다양한 역할의 하나가 아니라, 존재론적으로 이해했기 때문이다.

역할이나 프로그램으로 이해된 선교는 우리가 할 수 있으면 하고 할 수 없으면 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것이다. 그러나 ‘존재로서의 선교’는 선교하지 않는 교회를 생각할 수 없게 한다. 선교하지 않는 교회는 있을 수 없다. 아니 교회가 곧 선교이다.

‘존재로서의 선교’는 교회와 지도자와 신도의 존재론적 새로움, 곧 거듭남(회개)에서 시작된다. 교회의 정체성을 한꺼번에 위협하는 위기는 선교 프로그램의 부재에서가 아니라, 교회가 존재론적으로 선교적이지 않은데서 오는 것이다. 교회가 겉과 속이 다르지 않은 일관성을 가지고, 말씀 위에 선 믿음으로 연대적 사랑을 실천 할 때에 교회의 존재 자체가 선교일 수 있을 것이다.

‘존재로서의 선교’는 다른 종교와 다른 신앙을 가진 사람들과의 사귐에 열려있다. 선교가 회심과 개종, 전통문화와의 단절을 지향(강요)하는 한, 갈등은 그치지 않을 것이다. 존재로서 이해된 선교는 다른 종교와 신앙, 신념을 가진 사람들과의 ‘함께 사는 삶’(Konvivenz)을 지향한다.

‘인간이 되신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다 구원을 얻어 진리를 알게 되기를 원하신다’(딤전2:4-6). 어떤 이유로든지 그리스도교 안에 있지 않는 사람들을 배타적이고 공격적으로 대하는 교회는 ‘그리스도가 모든 사람을 위해서 자기를 대속물로 내주셨다’(딤전2:6)는 말씀을 선포할 수 없을 것이다.

교회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 민족들이 복을 받아야지, 오히려 갈등과 분열과 다툼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선교를 오히려 방해하는 것이 되지 않을까? 지금은 선교의 방법만이 아니라 선교의 궁극적 목적에 대한 신학적 패러다임의 변화를 진지하게 다시 숙고해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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