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회를 맞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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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회를 맞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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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8.09.10 1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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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돈 교수<실천신학대학원대학교>


교인들에게 교회는 어떻게 ‘체험’될까. 너무나도 뻔한 대답이 기대되지만 그래도 궁금하다. 보통 신학에서는 루터가 이야기하는 ‘믿는 자들의 공동체’ 또는 ‘거룩한 자들의 공동체’라고 이해를 하고 있다. 또 사도신경에서는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이 바로 교회를 지칭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핵심적인 부분은 바로 ‘코이노니아’라고 하는 공동체에 있다. 보통 우리가 ‘교제’라고 번역하기도 하고 ‘교통’이라고도 번역하는 그리스 단어이다.

이 단어는 빌립보서에서 바울 선생이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라고 고백할 때에 ‘참여’라는 단어로도 번역되어진다.

물론 이 참여라고 번역된 코이노니아라는 단어는 여기서 상당히 신비한 개념으로 보여진다. 실질적으로 바울 선생께서 그리스도의 부활과 권능과 고난에 참여할 수는 없지만 신비 가운데 거기에 참여함이 되는 것이다. 이 신비의 놀라움이 바로 교회로 교회되게 하는 비밀인 것이다.

코이노니아로서의 교회는 이렇게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놀라운 신비로서 우주적 교회에 우리를 초대한다. 거기에 지체되어짐을 우리는 그리스도와 하나되는 코이노니아를 통해서 체험하게 되고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아둔하여 ‘우리 교회’라 함은 내가 출석하고 있는 한 지역교회로만 알고 있다. 갇혀지고 틀지어진 조그만 교회당 안에서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교회를 체험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우리의 갇혀진 사고를 열어줄 수 있는 것은 그래도 지역 교회를 아우르는 상회(上繪)이다. 예를 들어 노회와 총회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상회에는 교회의 대표인 목사와 장로만 참석한다.

그나마 총회에는 그 중에서도 뽑힌 자들만이 참여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각각의 믿는 자들이나 거룩한 자들은 이러한 회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모르고 있다. 아니 어쩌면 거기에 관심을 가지는 것 자체가 불경한 일인 듯 여겨졌다. 그러다 보니 총회는 교인들이 아닌 총대들의 집회가 되어 버린 것 같다.

요즘 각 교단마다 총회를 한다고 기사가 나오고 있고, 적지 않은 광고들도 나오고 있다. 그런데 눈 여겨지는 것은 누가 총회장이 되고, 누가 총무가 되는가이다. 어떤 교계신문을 보니 머릿기사가 ‘이전투구’라고 나왔다.

선거판이 어지러워지고 돈봉투가 난무하는가보다. 서로를 헐뜯는 일도 나타나고 그 자리 얻어보겠다고 해명하고 변명하는 일들이 생기고 있다. 그들이 내세우는 정책도 잘 뜯어보면 한 표를 던지는 사람들의 입맛에 맞을 만한 것들이다. 교단의 이익을 잘 챙길 수 있고, 경제적 부를 축적해 줄 수 있는 사람이 바로 본인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첫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교회는 성도들에게 어떻게 ‘체험’되어질까. 지역 교회에서 체험되어지는 것은 말씀과 예배일 것이다. 그것이 아우구스부르크 고백에서 나오는 교회의 두 지표이다. 성도들은 이 말씀과 예배로 인해서 교회의 일원이 되고 거룩한 백성에 들어가는 기회를 갖는다. 그리고 이를 통해서 한 공동체로서 부름을 받고 신앙과 삶을 나누고 있다.

그런데 총회에서 이런 거룩함을 경험할 수 있을까. 아니 좀 더 본질적인 질문을 던져 보자. 총회는 과연 교회일까. 코이노니아가 아니라 ‘이전투구’가 경험되어지는 그 곳도 과연 교회가 될 수 있을까. 혹 그곳이 성도(聖徒)가 아니라 총대가 모이는 곳이기 때문에 교회가 아닐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가르침은 그것이 아니지 않는가. 총회도 거룩한 곳이기를 바란다.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에 참여함이 되는 자들이 모이는 신비의 코이노니아가 이루어지는 교회로 우리들에게 체험되어지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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