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받는 상생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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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받는 상생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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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8.07.30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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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찬환목사 <백석대 교수>

하나님의 창조의 원리는 서로 사랑을 나누는 상생의 길이다. 기독교의 원리는 상생이다. 천지만물은 사랑의 원리로 창조되었다. 인간은 사랑의 원리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으며 하늘, 땅, 해와 달, 바다, 먹거리, 자연 모두가 서로의 사랑을 나눔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창조되었다.

필자가 중병에서 얻은 진리는 십자가 윤리로 위로 하나님 사랑, 부모님 사랑의 경외윤리이며, 옆으로 사람 사랑의 이웃과 함께하는 수평윤리다. 지금 우리의 결핍은 윤리 실종이다. 새 정권 취임 5개월째다. 지금 여야 가릴 것 없이 국정부재로 나라가 어려움을 받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낙심할 필요가 없다. 성경에 해법이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위기가 기회다. 과감한 위기 청산으로 나라를 살리자.

첫째로 예수님이 보여주신 상생의 본이다. 하나님의 본체이나 그는 동등됨을 취하지 않으시고 종의 형태로 이 땅에 오셨으며 자기를 낮추어 섬김을 받으려 오심이 아니고 섬기러 오셨으며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오셔서 십자가상에 값을 지불하셨다. 주님의 삶은 어떤 능력을 보이심보다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한 사랑의 연민으로 섬기는 것이다. 하나님은 번제의 요구보다 자기의 자비를 알아달라고 하셨다.

그는 힘없는 여인들 앞에 찾아가 율법을 초월한 사랑의 배려로 상생의 길을 보여주셨다. 어떤 날 베드로의 집을 찾아가 장모의 열병을 치료하셨다. 병의 포로로 있는 장모의 열병을 불쌍히 여기셨으며 병든 가정의 베드로를 비롯한 식구들의 괴로움에 동참하여 상생의 나눔의 본을 보인 것이다.

38년 된 베데스다 못가의 환자를 치료해 능력을 나타냄보다 평생의 비참한 삶의 청산에 있다. 고침 받는 그들은 치료의 현장에서 예수를 수종 들며, 예수의 공동체로 변화시켰다. 다음은 사도바울도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를 만난 후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는 그리스도임을 외치고 이방인의 사도를 충성하였다.

바울의 회심 중에는 적지 않게 영향을 준 스데바나의 삶의 모습, 대선배 바나바가 부흥 중에 있는 안디옥 교회에 자기를 초빙하기 위하여 다소까지 찾아와 동역자로 일하게 하신 그의 하나님 사랑과 교회사랑의 감동 등이 그의 마음을 움직였다.

그는 자기의 자랑스런 출신과 신분을 포기하였으며, 사도권을 제한하고 천막작업을 하여 또한 뒤돌아 본 자기를 보면서 충성되이 여겨 사도직은 받고 괴수 중 죄인 괴수라며 모든 사람이 종이라고 선언하였다. 그는 하나님의 양자의 영을 받은 자는 하나님이 영광과 고난에 동참해야 한다고 하였으며 이 고난을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라 하였고 자기 육체의 채움이 오히려 기쁨이라고 하셨다.

성경은 우리가 너희를 받음과 같이 너희는 서로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하셨다. 여리고에서 만난 강도사건에서 말없이 봉사한 사마리아인을 설명하면서 너도 가서 이와 같이 하라고 하셨다. 한국교회의 성도관리나 대사회봉사는 지금 지탄받아 마땅하다. 윤리상실, 부정개입, 정직치 못한 불신, 물량주의나 기복에 빠졌으며 인격없는 예수를 만들어 또 다른 우상을 만들고 있다.

한국교회는 유일한 최후 분단국으로 통일사역을 먼저 국민화합으로 상생의 본을 보여야 할 것이다. 지금은 촛불시위할 때도 아니고 촛불시위에 동참하는 국회의원도 자제해야 한다.

여권은 제발 당내의 불리한 모습을 보여도 안 될 것이며 국민의 뽑아준 인심을 하나님의 뜻으로 겸손을 보이며 인심을 천심으로 받아드려야 한다. 그리고 깜짝 놀랄만한 선물로 주어진 기회를 애국의 충심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법은 법대로 소신정치를 하되 복잡한 지정학적 주변정치도 지혜롭게 대처해야 한다. 좀 더 멀게 좀 더 조밀하게 여야를 떠난 상생정치로 세계로, 미래로, 한국교회의 선구적 역할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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