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겪은 6.25 (1) - 김정섭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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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겪은 6.25 (1) - 김정섭 장로
  • 정재용
  • 승인 2008.06.19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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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그 자체가 죄악, 하나님 은혜만 사모합니다"

“주님! 이 전쟁에서 살아서 돌아간다면… 불구가 되어도 괜찮습니다… 살아서 가족을 볼 수만 있다면…”

온 세상을 뒤덮는 총소리에 묻혔던 하나님을 향한 절규의 기도. 김정섭장로(새문안교회 은퇴장로, 한국기독교학교연합회 사무국장)가 스무 살 겨울 6.25전쟁 중 정신을 잃으며 하나님을 찾았던 이 기도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지난 5일 현충일을 하루 앞두고 만난 김장로는 78세의 은퇴 장로라고 보기 어려운 열정으로 살아가고 있음이 느껴졌다.

“국가유공자라고 대접받으면서 살고 있지만 사실 마음이 편하지 않아요. 전쟁 통에 죽음이 두렵고 가족이 두려워 드린 기도를 들으시고 살려주셨건만…” 김장로는 6.25참전 이후 교육자로 평생을 살아왔지만 조금 더 특별한 삶을 살게 하신 하나님의 뜻을 뒤늦게 깨달아서 지금도 할 일이 너무나 많다며 지난날 하나님의 은혜를 회상했다.

한반도가 둘로 나눠지기 시작하던 1950년 6월 25일. 그해 8월말 경북 의성에 살고 있던 스무 살 청년 김정섭과 교회 친구들 20여명은 낙동강까지 밀린 국군을 보며 자원입대를 하기로 결심했다. “당시가 구제 중학교 6학년 때였으니까… 그때 함께한 친구들은 정말 순수하고 의로운 청년들이었어요. 나라와 겨레를 위해 헌신할 수 있는 기회가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었죠.”

그렇게 시작된 6.25 참전이 김장로에게는 같은 민족끼리 총부리를 겨누고 죽고 죽이는 고통스런 순간의 연속이었다. “우리가 자원입대를 했을 당시는 밤에는 인민군이 낮에는 국군이 번갈아가면서 낙동강 유역을 점령할 만큼 치열한 상황이었어요. 기초 군사훈련은 받아보지도 못하고 소대 선임하사가 총에 탄환을 넣고 장전해서 격발하는 시범을 보이고는 바로 그날 밤 실전에 배치됐죠.”

애국을 하겠다고, 나라를 지키고 역사 앞에 떳떳하겠다고 나섰지만 막상 총을 들고 있다는 것이 너무나 서글펐다. “전쟁은 그 참혹함과 잔인함을 직접 경험해보지 않으면 아무도 알 수 없어요. 반인류적일 뿐만 아니라 사람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전쟁이라는 그 자체만으로 아주 큰 죄악이에요.”

이런 고백은 김정섭장로 한 사람만의 생각은 절대로 아닐 것이다. 1950년 6월 25일부터 총을 들고 전장을 뛰어다니며 피를 흘린, 또 우리민족이 나뉘는 아픔을 자신의 죽음, 전우의 죽음, 가족의 죽음, 친구의 죽음, 자신이 사랑했던 사람의 죽음과 바꿔야 했던 모든 사람들의 고백임을 반백년을 넘어선 분단의 현실이 입증해주고 있다.

이처럼 함께 참전했던 친구들의 주검을 뒤로 하고 겨우 목숨을 건진 김정섭장로의 삶은 먼저 간 이들의 몫까지도 살아야하기에 그 무게가 그리 가볍지만은 않다. “제가 소속된 부대는 6사단 소속 수색대였어요. 사단 전체가 안전하게 이동할 수 있도록 선봉에 서서 인민군으로부터 보호하는 임무였죠. 중요한 임무였던 만큼 위험도 많이 따랐었어요.” 아니나 다를까 승승장구하며 압록강까지 올라갔던 국군은 꽹과리를 두두리며 남하하는 중공군들의 인해전술에 밀릴 수밖에 없었다. 이때 선봉에 서있던 김장로는 후퇴하던 중 왼쪽 대퇴골에 부상을 당했고 총격을 당한 국군의 지프트럭까지 그를 덮치면서 주님을 부르짖으며 의식을 잃고 말았던 것이다.

학교 선생님이 너무 되고 싶었던 소박한 스무 살 청년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으셨던 것일까. 총성이 멈춘 뒤 지프트럭에 깔려있는 김장로를 구출하기 위해 돌아온 국군들에 의해 평양 병원에서 응급치료를 받고 후송선을 타고 부산으로 내려올 수 있었다. “하나님께서 저를 살려주신건 정말 큰 은혜를 부어주신 것이라 생각해요. 정신없이 피격당하고 전우들의 시체도 수습해줄 수 없을 정도로 급박한 상황이었는데... 게다가 같이 간 친구들은 이미 절반 이상 죽은 뒤였죠.”

그렇게 극적으로 구출돼 수술을 받고 3년이란 세월을 지팡이를 짚고 살아야 했지만 마음의 지팡이는 지금까지도 내려놓을 수가 없다고 했다. “제대 후 귀향했을 때 가족을 만난 기쁨보다는 동급생 교회친구의 미망인을 만났을 때 할 말을 잃었던 기억이 지금도 눈앞에 너무 선해요. 함께 돌아왔어야 했는데...” 갓 결혼한 부인을 두고 먼저 간 친구를 생각하며 고통을 나누고 싶었지만 지팡이를 짚고 있는 자신도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인정해야만 했다.

이후 살려만 달라고 했던 기도로 살아났다고 고백하는 김정섭장로는 연세대학교에서 교육학을 공부하고 교사의 길로 들어서게 됐다. “기독교 가정에서 자랄 수 있었던 것도 하나님의 은혜고, 전쟁터에서 살아 돌아올 수 있었던 것도 하나님의 은혜고, 교사의 꿈을 이룰 수 있게 해주신 것도 하나님의 은혜죠. 저는 평생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까하는 고민으로 살기에도 바쁜 사람인 것 같아요.”

전쟁 중에 “살려만 주시면…”이라고 했던 기도에 하나님께서는 기도하는 교사가 되라고 길을 열어주셨다. 미션스쿨인 대광고등학교에서 국민윤리를 가르치는 교사로 교편을 잡고, 영락고등학교에서 교장으로 정년퇴직하기까지 하나님께서는 그의 인생을 기도 없이는 단 하루도 살 수 없는 곳으로만 인도하셨다. “꼭 선생이 되겠다고 고집했더니 전쟁 중의 약속은 지키라고 그러신 것 같아요. 서울에 올라와서 새문안교회 고등부 교사로도 15년 동안 섬길 수도 있었고 지금은 목회자로 이름이 들려오는 제자들도 적지 않아요.” 여의도순복음교회 이영훈목사, 예장통합 사무총장 조성기목사, 새벽교회 이승형목사 등 대광고등학교 출신 목사들이 김정섭장로에게는 조금 더 특별한 제자들이다.

은퇴 후 전쟁터에서 신앙을 나누며 격려했던 먼저 간 친구들을 그려보지만 한국기독교학교연합회 사무국장을 맡게 된 김정섭장로는 아직도 할 일이 너무나 많다. “한국교회가 기독교학교의 중요성을 빨리 알아나가야 해요. 유태인들이 뿌리를 중요하게 여기는 것처럼 우리도 말씀의 뿌리를 중요하게 여기며 살아갈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물론 역사의 뿌리도 함께 가르칠 수 있으면 더 좋고요.”

유태인들이 유월절에 누룩이 들어가지 않은 무교병을 먹는 것처럼 6월 24일 찐 감자와 주먹밥을 먹으며 6.25를 기념해본다는 김정섭장로. 하나님께 입은 은혜에 감사함으로, 먼저 간 친구들에 대한 미안함으로 마음의 지팡이를 내려놓지 못하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젊은 세대들의 호국정신이 부족하지는 않을지 걱정 된다고 전했다.

“얼마 전 한 고등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만일 한국에서 전쟁이 나면 참전할 것인가’에 대해 물었더니 절반도 넘는 학생들이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40%정도만 참전을 하겠다고 답하는 것을 보며 가슴이 참 답답했어요. 과연 저 학생들이 역사의식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전통과 역사를 지켜준 것에 진심으로 감사를 하고 있는 것일까, 의문이 생기더라고요.”

김장로는 ‘어떻게 하면 더 풍족하게 살 수 있을까’만 고민하는 이 세대에게 목숨을 바치며 나라를 지켜낸 선조들에 대한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을지, 또 그런 마음들이 우리나라의 미래를 어떻게 바꾸어 나갈지 걱정스러워했다.

“베를린장벽이 무너진 것을 보면서 한국의 젊은이들의 감사하는 마음이 회복되기를 바래요. 바른 역사의식과 호국정신으로 다시는 일어나서는 안 될 비극을 지켜낼 수 있는 청년들이 많아지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는 이 세상에 악하고 선한 모든 것들이 공존할 이유가 있다고 전하는 김정섭장로. 이 시대 한국교회와 젊은이들이 하나님의 어떤 부르심을 받고,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기를 원하시는가에 도전을 받아 사명감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기를 소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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