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뒤편으로 숨는 신앙과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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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뒤편으로 숨는 신앙과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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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8.05.14 1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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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희창 목사<서초교회>


신약성경의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은 누가 한 사람이 기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글의 분량으로 따지면 신약성경 전체의 사분의 일이 넘는 것으로 사도 바울이 기록한 바울서신들보다 훨씬 더 많다. 그런데 그렇게 많은 말씀을 기록해서 남겨놓은 누가는 그 말씀들 안에 자신의 이름은 전혀 남겨 놓지 않았다. 자신의 이름을 알리려는 의도가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말씀을 누가가 기록한 것인지 아닌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에 대하여 이런 대답을 하는 성서학자들이 있다. 사도행전 말씀 몇 군데서 ‘우리’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그 ‘우리’가 누구인지 그걸 밝혀내면 된다는 것이다.

사도행전 16장 10절이나, 사도행전 20장 5절에서 우리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거기서 우리라고 말하는 사람은 ‘사도 바울과 함께’라는 의미에서, 그리고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중이라’는 의미에서 ‘우리’라는 표현을 하고 있다. 그러니까 그 우리라고 말할 만한 사람이 누구인지 그걸 연구하여 결론을 내린 결과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기록한 사람은 누가라는 것이다.

신약성경의 사분의 일 이상을 기록하여 남긴 그는, 자신에 대해서는 고작해야 우리라는 표현 정도만 남겨놓았다. 말씀을 기록한 자신을 알리기보다는 ‘성령의 역사가 어떻게 일어났는지’,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어떻게 세워져 갔는지’ 그것을 알리려고 했다. 그러니까 누가는 ‘성령’과 ‘교회’ 뒤편에, ‘우리’ 뒤편에 숨어 있는 것이다.

창세기 11장에 바벨탑 이야기가 나온다. 사람들은 힘을 합하여 바벨탑을 높이 쌓으려 했다. 사람들이 힘을 합하여 열심히 높은 탑을 쌓았던 것은 자신의 이름을 높이려 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들과 바벨탑을 심판하셨다. 그래서 바벨탑은 쓰러졌고, 사람들은 온 세상에 흩어지고 말았다.

바벨탑의 이야기는 오순절 성령강림과는 정반대의 사건이다. 바벨탑은 인간들이 자신의 뜻과 이름을 내세우려고 쌓았던 탑이다. 그런데 오순절 성령강림절에 제자들은 자신의 이름에는 관심이 없었다. 성령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전하는 일에만 관심이 있었다.

예수님께서 저 낮은 곳 베들레헴 마구간으로 오신 것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과 인간을 진실로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오순절 성령 강림절에 성령 충만하여 복음을 외치는 제자들을 보면서 세상 사람들은 “저 사람들이 술에 취했다”고 했다. 제정신이 아닐 정도로 예수 그리스도를 외치며 인간의 자존심 같은 것은 생각지 않고 열심히 기도하던 제자들은 술에 취한 사람처럼 보였을 것이다.

내가 사랑하는 나의 주 예수님 때문에, 제정신이 아닌 술 취한 사람처럼 보였던 그 제자들에 의하여 복음은 땅 끝까지 전파되어간 것이다. 이 부족한 나를 통하여 귀한 생명이 태어나서 하나님의 종이 되기를 바라며 술 취한 듯이 열심히 기도하던 한나로부터 사무엘이 태어나고, 사무엘은 이스라엘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지금 이 나라는 여전히 혼란스럽다. 함께 앞으로 나아가기보다는 앞으로 가려는 자의 옷자락을 붙들거나 서로 넘어트리는 일을 주로 하려는 듯이 보인다. ‘우리’를 다 넘어트리더라도 나의 뜻만은 펼쳐야겠다는 어두운 정치적 의지가 여기저기서 활약하는 듯하다.

우리 시대 교회들의 이미지는 오순절 성령강림보다는 바벨탑에 더 가깝게 보일 때가 있다. 하나님을 위하여 성령 충만하기 때문에 술 취한 사람처럼 보이는 사람은 찾아보기 어렵다. 세상이야 뭐라 하든지 간에 나의 뜻과 나의 이름을 높이 널리 알리려는 대중매체와 홍보에 취한 듯이 보이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 점에서는 세상이나 교회나 비슷하다.

성도들의 고난과 순교의 피가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온 세상 땅 속으로 깊고 넓게 퍼져간 그 만큼, 온 세상에 많은 교회들이 세워진 것이요 수없이 많은 기독교인들이 탄생한 것이다.

교회와 목회자를 널리 알려서 교회 성장이 가능하다면, 진리와 진실은 크게 문제 삼지 않고 살아온 한국 개신교 전반적인 삶은 이제 다른 방향을 바라보아야 한다. 웬만한 사건이 일어나기만 하면, 나라 전체를 뒤흔드는 정치적 권력 투쟁의 장(場)이 형성되고 마는 이 나라의 삶의 방식에 대해서, 우리도 교회도 큰 책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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