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타성과 거리가 먼 하나님의 사랑 선교 반영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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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타성과 거리가 먼 하나님의 사랑 선교 반영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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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8.04.30 1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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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태 식교수<신부·대한성공>


한국의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역사의 예수가 유대교를 완전히 뒤엎고 새로운 종교를 시작했다고 여기는 분들이 있다. 예수가 유대교 최고회의에서 재판을 받아 억울하게 사형을 당했고 그 뒤로 그리스도 교회는 유대교와 단절 했으니 충분히 그런 추측이 가능하다. 하지만 사실은 그와 다른데, 예수는 철저히 유대교인으로 살았던 분이다. 그래서 난지 8일 만에 할례를 받았고, 매주 안식일이면 어김없이 회당 집회에 참여했으며 절기 따라 예루살렘 순례를 거르지 않고 행하였다.

어디 그 뿐인가? 예수와 만나고 기꺼이 제자가 되었던 고위급 유대교 지도자들도 있었다. 구체적으로 니고데모나 아리마태 요셉이 있고 그 외에도 이름 모를 많은 율법사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따랐다. 그들은 예수에게 서슴없이 ‘랍비’(선생님)라는 호칭을 부여했다. 예수보다 연상이고 사회적인 지위도 상대적으로 높았을 법한데 예수를 극진히 섬긴 것을 보면 그들의 겸손에 존경심이 절로 든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예수의 직제자들은 유대교의 범위를 벗어나려는 의지를 갖고 있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복음이 세계화의 길로 접어들면서 기조가 크게 바뀐다. 특히, 유대교에 문외한이었던 이방인들에게 (유대교의 선봉장 격인) 율법은 크나큰 걸림돌이었다. 이스라엘 본토에서 성장하고 예수를 만난 직제자들에게야 율법을 지키면서 예수를 따르는 게 무리가 아니었겠지만 이방인들에겐 낯설고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의욕적인 복음전도사 바울은 그리스도교의 장래가 이방인들을 포함하는 세계화에 달려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어떤 형태로는 율법을 대체할 만한 가치를 천명해야 했다.

오늘날 더 이상 제국주의 시대의 공격적인 선교정책은 먹혀들지 않고, 유럽의 교회는 점점 활기를 잃어가고 있으며, 그리스도 교회에 대한 비난은 어느 시대보다 거세졌고, 도전의 땅마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듯하다. 그리스도교가 총체적인 위기에 놓인 것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그리스도교와 타종교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는 실로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대략 세 가지 방향으로 움직임을 정리할 수 있는데, 배타주의와 포괄주의와 종교다원주의다.

배타주의는 글자그대로 타종교를 인정하지 않고 오직 선교의 대상으로 보는 것이다. 이제까지 그리스도교가 지향했던 대로의 경향이다. 하지만 잘못하다 죽는 수가 있다. 포괄주의란, 타종교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저도 모르는 가운데 추구하고 있다면 그들 역시 그리스도인의 범주에 넣을 수 있다는 것으로,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의 입장이기도 하다. 종교다원주의는 그리스도교 가르침의 무게중심을 그리스도론에서 신론으로 슬쩍 옮긴 것이다. 그리스도교와 타종교의 대화 주제를 수행, 영성, 의례, 신심, 자연 보호, 북한 살리기, 북한 죽이기, 정권 바꾸기 등으로 제한하면 얼마든지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수 있다. 하지만 그리스도론으로 돌아가는 즉시 큰 장애물이 형성된다.

원래부터 하나님은 배타성과 거리가 먼 분이다. 예수는 자연을 통해 그렇게 한없이 폭이 크신 하나님을 우리에게 알려주었다. 자연에서 하나님을 만난 예수는 자연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가르친다. 원수 사랑을 강조한 예수는 하나님을 가리켜 ‘선한 이에게나 악한 이에게나 햇빛과 비를 내려주시는 분’으로 선언한다.

타종교와 대화에서 최대 과제는 교리화된 그리스도론을 재해석하는 데 있다. 아니 열 걸음 물러선다 할지라도 전통 그리스도 교리를 넘어 역사의 예수 자신의 목소리를 듣는 작업이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그리스도교는 사람 살리는 종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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