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노력과 상관없는 ‘기독교의 구원’이 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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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노력과 상관없는 ‘기독교의 구원’이 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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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8.04.30 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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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익수 교수 <감리교신학대학교>


사람들은 어느 시대에나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인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복음을 그냥 수긍하고 받아들이기 보다는 율법의 행함과 같은 종교적 행함, 혹은 자신의 종교적인 공적과 같은 것으로 축소시키거나 변질시키기를 좋아한다. 그 결과,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종교적 의식, 규칙, 교리, 그리고 소위 ‘높은 곳의 하나님께 이르기’에 필요한 완벽하다는 모든 조치와 장비를 갖춘, ‘유대교’를 대체할만한 또 하나의 ‘종교’로 전락시킨 것도 사실이다.

우리의 구원은 더 이상 종교적인 수행이나 허례나 교단의 권위나 성직자들의 권세와는 아무 관계가 없고, 더 나아가 우리가 매 주일마다 겨우 겨우 잘 해내고 있다고 안도(安堵)하는 무슨 무슨 종교적 모임이나 행사, “너는 뭐고 나는 뭐가 되었다”면서 환호와 꽃다발을 주고 받고, 직급에 맞는 가운들을 뒤집어쓰고 거들먹거리거나, 박수치는 ‘종교 놀음’과도 더욱 관계가 없다.

세상의 모든 종교인들은 ‘높은 곳에 계시는’ 神(신)을 찾는데, 자신들의 종교적인 각고의 노력으로 신을 만나고 신을 기쁘게 하려는 공통적인 특징을 갖고 있다. 그들은 천신만고(千辛萬苦) 끝에 마침내는 신을 소유해야 직성이 풀리고, 그런 저런 여러 종교적 노력에 큰 의미를 부여하고, 종교적으로 행동하는 것을 무척 좋아하고, 그 행동의 성패에 희비가 엇갈리고, 심지어는 ‘성경’이나 ‘교리’를 수호한다는 종교적 행동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의 구원은 인간을 사랑하사 먼저 찾아오신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의 선물로 주어지는 것이지, 인간의 종교적인 노력과는 하등의 관계도 없기 때문에 세상의 그 어떤 ‘종교’ 그 이상의 것이다. 세상의 종교인들이 신을 소유화하고 용신(用神)하려 한다면, 참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에게 자신을 내 맡기고 헌신한 사람이다.

그러나 너무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바울 시대의 영-열광주의자나 유대주의화를 획책했던 사람들처럼, 여전히 여타의 종교인들처럼 영적인 신비한 체험, 율법주의, 형식주의, 규칙, 교리나 공식들, 체제와 같은 종교적 쳇바퀴가 은혜에 우선하고, 행함이 믿음이나 신뢰를 대신하는 그런 종류의 값싼 종교체계로 축소시키기를 좋아한다.

만약 바울의 논의가 오늘날에도 진지하게 받아들여진다면, 그것은 민족적, 문화적, 종교적 자만이나 우위성을 강조하는 모든 주장들은 임의적인 것이거나 부질없는 것이 되고, 종교들과 종파들, 그리고 믿음의 차이들에 따른 반목과 미움 또한 사라지게 될 것이다. 세상에서는 교회 안과 밖, 교계에서는 보수와 진보진영, 그리고 교회 안에서는 민족적, 사회적, 경제적, 성적인 모든 차별이 종식되어 모두가 “한 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는”(15:5-7) 일만 남는다.

많은 교회들과 교인들이 하나님께만 드려야할 당연한 예배와 감사, 그리고 그리스도에 대한 철저한 헌신 보다는 자신들의 안전을 보장해 줄 수 있고 자랑할 수 있다는 ‘종교적인 것’에 더 관심을 갖는다. 그들은 사실 다른 사람들 보다 더 친절하지도 정직하지도 겸손하지도 사랑이 넘치지 않으면서도 그들의 소위 ‘종교적인 것’이 그들을 교만하고 독선적으로 만들고 있다.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선뜻 들어오는 것을 주저하면서 교인들의 위선을 질타한다. 그들은 ‘종교’라는 유희를 꿰뚫어 보고 그 허구성과 교인들의 위선을 목도한 것이다. 바울은 ‘형식에 치우친 종교’의 실패를 드러낸다. 그러므로 아무리 종교적인 사람이라도, 유대인이건 교인이건, 죄에서 자유로울 수 없어 복음이 필요하고, 더 더욱 중요한 것은 진심으로 회개하는 마음과 외식함이 없는 전인격적인 삶의 변화가 반드시 요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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