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행정·열린전도 행하는 강화군수 김선흥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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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행정·열린전도 행하는 강화군수 김선흥 장로
  • 승인 2001.11.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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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기도로 하나님의 지혜를 구합니다”

“하루를 새벽기도로 시작하지 않았다면 군수생활은 불가능했을 겁니다. 지역 이기주의가 팽배한 상황 속에 군내에 납골당, 쓰레기 소각장, 하수처리장을 짓겠다고 했으니 주민들의 반발이 얼마나 심했겠습니까. 하나님은 새벽기도를 통해 저를 단련시켰고 민원이 들어올 때마다 지혜와 사랑의 마음을 주셔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백부장의 믿음을 거울삼아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동행했던 것이 가장 큰 힘이었습니다.”

강화군수 김선흥 장로(은혜교회·65). 어린 시절 상처투성이였던 가난한 소작농의 아들은 못 배운 사람들을 돕는 법조인이 되겠다는 꿈을 꾸어 왔다. 비록 법조인의 꿈을 이룬 것은 아니지만 50년이 지난 지금 강화군수라는 위치에서 하나님을 의지하며 열린 행정으로 주민들의 아픈 마음을 감싸주고 있다.

강화군청에 들어서면 여느 관공서와는 다르다는 느낌을 받는다. 가장 먼저 시선을 끄는 것은 주민들의 편의를 돕기 위해 은행을 모델링한 1층 민원창구이다. 행정에 어둡고 노약자가 많은 군내의 형편을 감안한다면 더 없는 배려가 아닐 수 없다. 이것 뿐 아니다.

사업장, 학원 등 허가 한번 받으려면 각 층을 오르내리며 다리품을 팔아야 했던 폐단을 과감히 개선해 창구를 단일화한 ‘허가과’ 를 신설한 것과 건물신축에 앞서 불필요한 서류들을 생략한 ‘사전심사제’를 도입하는 등 강화군청에는 주민들의 눈높이에 맞춘 열린 행정의 모습을 곳곳에서 실감할 수 있다. 모두 김선흥 장로가 민원을 통해 거론된 주민들의 의견을 적극 반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김 장로는 강화를 교육과 문화, 역사가 살아 있는 땅으로 만들겠다는 약속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 우선 재임 기간 중 강화도 내에 가톨릭대, 가천의과대, 안양대 강화캠퍼스 등 3개 대학을 유치해 지역 교육사업에 큰 획을 긋기도 했다. 이것은 형편상 유학을 갈 수 없는 강화군 내 학생들에게 대학을 진학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지역 발전이라는 명분 아래 러브호텔 등의 위락시설 설치 요구가 많았지만 단호히 거절하고 해안순환도로 건설,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고인돌사적관 건립 추진, 태권도공원 조성 등 문화사업을 적극 추진하고 있다.

김선흥 장로는 열린 행정뿐 아니라 열린 전도사로의 귀한 사역도 감당하고 있다. 그는 믿지않은 사람들에게 교회를 꼭 다녀야 한다고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는다. 그가 매년 70여 명을 전도할 수 있었던 노하우는 자신의 삶 속에 투영된 예수의 형상을 보여주는 것이다. 매주 금요일마다 군수실에서 직원예배를 드리는 등 말보다는 행동 속의 겸손함과 진실됨을 보여주면 주위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은 자동적으로 전이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김 장로의 신앙생활의 첫 단추는 지난 75년 부친의 죽음을 계기로 끼워졌다. 무속 신앙을 받아들였던 집안 환경탓에 모태 신앙인이었던 아내가 신앙생활을 하는 데 어려움이 컸다. 더욱이 평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면 불가능이란 없다’라는 신념을 갖고 자아만족 속에 인생을 살아왔던터라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던 부인 박정자 권사의 계속적인 권유에도 꿈적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결국 부친의 죽음은 그에게 인생무상을 깨우쳐주었고 부족한 자아를 실감케하는 촉매제가 된 것이다. 물론 부인 박 권사의 끊임없는 기도가 바탕이 되었기에 그날 이후 교회에 출석하게 된 김 장로는 시작부터 새벽기도에 출석하는 등 남들과는 사뭇 다른 태도를 보였다. 무슨 일을 하든 최선을 다한다는 성격이 신앙생활에도 그대로 나타났던 것이다.

새벽기도는 물론 테이프, 신앙서적, 구역예배, 성경대학 등 신앙에 도움이 될만한 것들이라면 무슨 일이라도 발벗고 나섰다. 어설프게 하나님에 대해 알면서 교회만 왕래하는 신앙은 그에게 도무지 용납되지 않았다. 이런 열성적인 신앙의 의지가 그의 삶을 지탱해 주는 큰 힘이 됐던 것이다.

대학원을 졸업하고 건설공제조합에서 평범하고 행복한 생활을 하던 김 장로가 왜 모든 것을 정리하고 정치에 입문했을까? 원래 김선흥 장로의 인생의 목표이자 꿈은 바로 법조인이었다. 어린시절 가난한 소작농이었던 아버지가 산림녹화를 위반했다는 이유로 젊은 경찰에게 꾸지람을 듣던 모습을 목격했다. 어린 마음에 더욱 상처를 받었던 것은 당시 여러 명이 함께 잡혀왔건만 벌금 한푼 지불하지 못했던 부친을 제외하고는 모두 석방된 불공평한 법의 집행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김 장로는 불평등한 사회를 바로잡겠다는 다짐으로 법조인을 꿈꾸며 이를 악물었다. 목표를 세우고 공부를 시작했지만 집안 사정상 더 이상 학교를 다닐 수 없게 되자 몰래 가출해 고학을 시작하는 등 최선을 다했다. ‘나의 실력으로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야 한다’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사회는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법학과 대학원까지 졸업했지만 법조계의 높은 벽을 실감하고 건설공제조합에 터전을 마련했다.

나름대로 행복한 삶이었지만 어린 시절의 다짐을 절대 포기할 수 없었다. 궤도를 수정했다. 법조인이 아니라면 지역 주민들을 위해 발 벗고 뛰는 것이었다. 모든 것을 정리하고 고향 강화도로 돌아온 김 장로는 농어촌문제연구소를 설립했다.

김 장로는 연구소를 통해 젊고 배운 사람들이 떠나버린 농촌에서 노인과 힘없는 사람들의 억울함과 무지를 도왔다. 당시 야당 정치인으로서 낙선의 쓰라린 경험도 했지만 끝까지 민의에 귀 기울이고 앞장섰던 덕에 1995년 강화도 최초의 민선 군수로 그것도 2번씩이나 선출되는 영광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김 장로가 민선 군수가 된 이후 강화군은 달라지고 있다. 생활환경이나 문화수준이 한 단계 높아졌다고 할까. 김 장로는 이 모든 공을 하나님과 강화군민에게 돌리고 있다. 부족한 자신을 사용해 많을 일들을 성사시키신 하나님의 덕이며 여러가지 행정정책에 별 탈없이 협력해 준 강화주민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것이다.

한반도 복음화의 길목이 됐던 강화도. 기독교 정신이 배인 이 곳에 김선흥 장로같은 믿음 좋은 일꾼이 헌신하며 선조들의 희생을 값지게 하고 있다.

김광오기자(kimko@uc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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