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작은 관심으로 북한 어린이의 소중한 생명을 살릴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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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작은 관심으로 북한 어린이의 소중한 생명을 살릴 수 있어요”
  • 현승미
  • 승인 2008.04.11 10: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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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천적 신앙인의 모습으로 그리스도의 사랑 전하는 최근현장로

많은 이들에게 고향은 따뜻한 어머니의 품으로 기억된다. 언제든 어떤 모습이든 관여하지 않고 무조건 두 팔 벌려 반가이 맞아 줄 그 곳. 그런 고향을 가까이 두고도 갈 수 없다면 항상 마음 한 켠이 비어있는 듯한 쓸쓸함을 간직하고 살게 된다. 심지어 가족을 남겨두고 왔다면 더더욱 그에 대한 그리움은 사무칠 것이다.


75세라는 적지 않은 나이에도 SEED선교회를 통해 왕성한 활동을 하며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해 매일매일 기도와 실천적 신앙인으로 살아가고 있는 최근현장로. 북한 함경도에서 태어나 홀홀 단신으로 쫓기듯 내려와 지금까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살았다는 그는 고향을 생각하면 빚진 자의 마음일 될 수밖에 없다고 고백한다.


“처음에는 그저 죽기 전에 고향 땅을 한 번 밟아보고 싶었습니다. 부모님과 가족들의 소식도 궁금했지요. 그런데 정말 우연한 기회에 북한을 갈 수 있었습니다. 비록 내 고향 땅까지 갈 순 없었지만, 먹을 것이 없어 굶어 죽어가는 부모 잃은 아이들과 황폐해진 민둥산을 바라보며 하염없이 눈물만 흐르더군요.”


이제는 북한으로 출퇴근을 하고, 금강산으로 여행을 가는 시절이다. 걸어서 북한 땅을 밟을 수 있을 정도로 개방됐지만, 여전히 정부 당국의 감시 가운데에서 활동에 제약을 받고 있다. 먹을 것 하나, 의약품 하나 마음대로 가져다 줄 수 없기에 더욱 안타깝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할 당시 그는 까까머리 고등학생이었다. 갑작스레 학교에 내린 징집명령을 피해 가족들의 얼굴 한번 볼 새 없이 산으로 도망쳤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숨어있던 그는 남하하는 국군을 따라 남한으로 내려와서 한평생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간직한 채 살아왔다.


그런 그에게 소련에서 만난 고려인들은 고향에 남겨두고 온 가족의 모습으로 다가왔다.


“91년도쯤이었습니다. 기독교연합신문사 사장으로 있을 때 전속합창단을 이끌고 소련으로 공연을 가게 됐지요. 모스크바,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등지를 다니며 선교공연을 하게 됐는데, 그때 처음으로 고려인을 알게 됐습니다.”


자신들의 삶의 터전이었던 토지를 빼앗기고, 중국으로 쫓겨 갔다가 다시 소련으로 쫓겨가 ‘카레이스끼’라는 이름으로 살아가는 그들의 슬픈 역사를 알게 됐다.


“그때 알게 됐습니다. 평생 나를 따라다니던 그 갈증의 이유가 무엇인지를요. 고향을 눈 앞에 두고도 갈 수 없는 마음. 가족을 버리고 떠나올 수밖에 없었던 설움. 그들에게서 제 모습으로 봤지요. 아마도 그들을 만나고 내가 갖고 있던 갈증의 50%정도는 풀렸던 것 같아요.”


고향을 떠나 온갖 설움과 배고픔에 시달리는 그들이 사는 그곳을 제2의 고향삼아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 또한 일회적인 도움이 아니라 말 그대로 ‘먹고 살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주고자 마음먹었다.


“운반하기도 쉽고, 특별한 재주가 없어도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를 고민하다가 고려인들을 통해서 속옷 장사를 시작했지요. 처음에는 빵도 못 먹는데 무슨 옷 장사냐며 부정적인 목소리를 내던 그들도 하나둘 변화했지요.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사랑이 절 흔들리지 않게 잡아줬던 것 같아요.”


그의 믿음과 고려인들의 노력이 합해져 장사는 점점 더 번창했다. 그렇게 고려인들에게 살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해 줄 수 있었다. 더불어 그 곳에서 인지도를 높일 수 있었다.


마침 나라 제정이 어려워 유치원을 폐쇄해야 할 지경에 이른 중앙아시아 타스켄슈타인을 도와 SEED유치원을 세웠다. 처음에는 제대로 배우지도 못하고 가르치지지도 못하는 고려인들을 위한 유치원으로 세워졌다. 그러나 현지교육과 다른 교육환경과 헌신적인 교사들의 모습은 현지인들에게 신뢰를 가져왔고. 2002년부터는 현지인의 아이들까지 지원하기 시작했다.


“아이들 교육에 차별이 있을 수는 없지요. 수용할 수 인원의 한계가 있어서 아쉬움이 남지만, 내 나라 남의 나라 구별은 하지 않습니다.”


그 곳에 대한 애착이 더해질수록 고향에 대한 그의 그리움은 더욱 커져만 갔다.


“지금은 우리나라도 북한을 방문할 수 있게 됐지만, 불과 5년, 10년 전까지만 해도 상상도 못할 일이었지요. 제가 북한에 갈 수 있었던 건 미국에 이민 가고 나서도 한참만이었어요.”


2001년도에 미국행을 선택한 최장로. 미국 영주권을 받고 들어갔지만, 한국이라는 꼬리표는 매번 그의 발목을 붙잡았다. 그러다 5년 만에 미국인 의사들과 함께 후원자 자격으로 북한 땅을 밟을 수 있게 됐다. 지난 2월에는 미국NGO단체와 함께 들어가 북한의 국수·빵 공장, 육아원(고아원) 방문을 할 수 있었다.


“육아원 원장님과 대화할 기회가 있었는데, 추울 때 아이들이 많이 얼어 죽었대요. 못 먹으니 당연히 면역력도 약할 수밖에 없지요. 해마다 고아가 돼서 들어오는 아이들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상황이지만, 있는 아이들조차 제대로 먹이고 입힐 수 없는 상황이라고 하더라구요. 그때 올 한해 여리고성의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살겠다고 마음 먹었지요.”


특별한 복음 전도 없이 자신의 삶 가운데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기며 고려인들을 변화시키고 러시아 현지인들을 변화시킬 수 있었던 최근현장로의 믿음이 있기 때문일까. 그는 자신뿐만 아니라 작은 도움의 손길들을 모아서 북한에 당장 절실한 우유와 의약품을 보낼 계획이다.


“이런 사역은 혼자서는 할 수 없습니다. 저 한 명이 보내는 작은 도움은 오랫동안 기근을 겪고 있는 그들에게 큰 힘이 되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개미군단처럼 작은 사람들 여럿이 구석구석에서 그들을 돕는다면 아마 큰 힘이 될 것입니다. 한국교회 역시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을 담아 작은 도움을 보내주길 원합니다.”


오직 입으로 하는 복음 전도만이 선교가 아니다. 예수님이 그랬듯이 병들고 헐벗은 이들을 위해 자신의 남은 것 하나까지 내어 줄 수 있는 그 마음이 곧 진정한 신앙인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그저 고향에 대한 그리움으로 시작된 최근현장로의 작은 관심이 한국교회 전체로 퍼져나가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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