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문턱에서 살려주신 하나님 위해 평생 헌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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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문턱에서 살려주신 하나님 위해 평생 헌신합니다”
  • 현승미
  • 승인 2008.03.13 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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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소폰으로 어려운 이들 위로하며 복음 전하는 최동규장로

철커덕. 경찰서 내 유치장 철문이 육중한 소리를 내며 열리는가 싶더니 이내 닫힌다. 잠깐 동안의 침묵이 흐른 후 차가운 벽을 타고 색소폰의 선율이 울려 퍼진다. ‘주님의 놀라운 은혜’, ‘선구자’. 찬송가와 가곡이 연달아 연주 된 후 누군가의 음성이 들린다.


“여러분 고향에 어머니가 계시지요? 이 연주를 들으시면서 어머니에게 마음의 편지를 한 번 써보세요.”


 올해로 꼬박 20년. 최동규장로(연희성결교회·최성기목사)는 경찰서 유치장에서 복음을 전해왔다. 죄 없는 이들조차 쉽게 발길을 두지 못하는 곳, 경찰서. 그런 그곳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한 달에도 여러 차례 스스로 유치장 철문을 열고 들어간다.

구부정한 모습으로 새우잠을 자고 있는 절도범, 조금 전까지 경찰관의 멱살을 잡고 씨근덕거리던 40대 중반의 남성, 유치장 벽과 자신의 가슴을 주먹으로 치며 분을 삭이고 있는 사람, 앞으로 진행될 수사 및 재판 과정들을 생각하며 초조해 하는 사람. 유치장 안은 그야말로 천태만상이다. 덕분에 봉변을 당한 적도 한 두 번이 아니지만 최장로는 이 사역을 멈출 수 없다.


“20년 전 하나님을 만나고 제 삶이 변화됐습니다. 아니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행복의 세상이 되었습니다. 주님을 알지 못해 과거의 저처럼 외로움과 고통 속에서 지내는 이들에게 평생 기쁨의 복음을 전해야지요.”


인생에 굽이굽이 굴곡이 있기 마련이지만 최장로만큼 생사의 고락을 여러 차례 넘긴 이도 많지 않을 듯하다.


아들을 최고로 치던 그 시절, 장남으로 태어나 부모님의 사랑과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자랐지만, 건강만큼은 그 사랑으로도 어찌할 수 없었다. 어린시절 비후성 축농증으로 시작해, 중학교 때는 기관지염과 류마티스 관절염을 앓았다. 그러나 그를 새 사람으로 변화시킨 진짜 건강의 적신호는 서른 중반에 나타났다.


군대를 전경으로 가게 된 것이 계기가 돼 경찰에 입문하게 된 그는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을 준비하는 중심에서 일하게 됐다. 1986년부터 서울경찰청 올림픽 기획단에서 일하게 된 것이다.


“원래는 대통령 경호안전 업무를 담당했어요. 업무 자체가 긴장되고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일인데다가 중요 행사가 있을 때는 며칠씩 밤을 세기 일쑤였지요. 집에 들어가지 못하는 횟수가 점점 늘어갔고 그 공백을 술로 메워 나갔지요.”


까다롭고 초조한 경호행사가 끝나는 날이면 긴장에서 해방돼 그동안 쌓인 긴장과 스트레스를 술로 풀었다. 급기야는 손이 떨리고 알코올 중독의 위기에 봉착했다. 스스로의 다짐과 가족들의 우려 속에 자제하려는 노력도 해봤다. 그러나 ‘올림픽 기획단’에 발령받은 후 과중되는 업무와 스트레스 가운데 하루하루 술의 힘을 빌리게 됐다. 그야말로 무에서 유를 창조해야하는 상황. 동료들과 업무 후 마시는 술 한 잔은 그에게 큰 위로가 됐다. 때로는 외로운 자신의 길을 함께 가주는 친구가 되기도 했다.


“당시 모범 경찰관을 선발해 5일간 전국 산업시찰을 보내줬는데 결국 거기에서 사단이 났지요. 선배들이 권해주는 술을 한 잔, 두 잔 받아 마시다 보니 어느덧 흥에 겨워 술을 마시지 않겠다던 아내와의 약속도 잊어버린 채 흥겨운 시간을 보냈지요. 술기운 때문에 몰랐는데 시찰을 마치고 출근하는 날 배가 살살 아파오기 시작했습니다.”


약을 먹어도 소용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통증은 점점 더 심해져 온 방바닥을 기어 다녔다. 이웃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견딜 수 없는 통증에 정신을 잃고 말았다.


병명은 급성출혈성췌장염. 그가 혼수상태에 빠져 있는 동안 병원에서는 가망없음을 선고했다. 당시 나이 서른일곱. 생을 마감하기에는 너무 젊은 나이였다. 다행히 4일 뒤 깨어났다.


“눈을 뜨고 제일 먼저 보인 것은 머리맡에 놓인 성경책이었습니다. 그리고 들리는 것은 어머니와 아내, 아이들의 기도 소리였습니다. 병원에서는 만 명 중 한 명에게 있을까 말까 한 기적이라고 하더군요. 정말 하나님이 아니고서는 하실 수 없는 일이었지요.”


아들을 위해 하루 다섯 시간씩 기도하던 어머니. 아빠를 살려주면 꼭 두 손을 잡고 교회에 나가겠다고 일기를 썼던 어린 두 아이. 그리고 절규하던 아내의 기도 덕분에 그가 살 수 있었다고 최동규장로는 고백했다.


“그런데 감사하는 마음도 잠시, 참을 수 없는 통증이 밀려왔습니다. 아파서 부여잡은 침대 매트리스 커버가 찢어질 정도였지요. 이런 아픔, 고통 주실 바에야 차라리 데려가 달라고 울부짖었죠.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매달렸습니다. 날 살려주시고 숨 쉬게 하신 이유가 분명 있을테니 살려달라고요. 평생 정말 좋은 생각, 좋은 마음으로 좋은 일만 하며 살겠다고 맹세했습니다.”


어려움을 겪는 상황에서 체험하고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일까 그는 퇴원 후 약속한대로 아이들의 손을 잡고 교회로 향했다. 출석한지 1년도 안 되서 간증 다니고 지금까지 20년 넘게 하나님의 복음 전도 용사로서, 이웃의 본이 되고, 예수님의 향기를 날리는 사람으로 살고 있다.


“정말 예수에 미친놈처럼 신앙생활 했지요. 3분 스피치부터 시작해 일대일 제자양육 훈련까지 열심을 다 했습니다. 교회 나가면서 새벽기도 끝나면 당시 셀목회로 절 훈련시키던 유충열 전도사님과 둘이서 큐티를 했지요. 기도방법 간증 요령까지 세세히 훈련 받았지요. 예수 믿으면 이렇게 변화가 되는데 내 주변의 믿지 않는 이들부터 변화시키자 마음 먹었지요”


전도 비전을 갖다가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을 갖게 됐다는 그는 주변을 둘러보며 자신보다 고통 당하고 힘들어하는 이들이 많다는 걸 깨닫게 됐다. 또한 그들을 향한 복음의 열정을 품게 됐고, 그것이 유치장 선교로 이어졌다. 한때 알코올 중독자로 살아온 자신의 삶을, 죽음의 문턱까지 갖다 살아온 하나님의 은혜를 진심을 담아 그들에게 전했다.


유치장에서 시작된 그의 전도는 영등포역 노숙자 쉼터, 외롭게 홀로 사는 독거노인, 쪽방 알코올 중독자, 치매·중풍 노인들을 향한 봉사와 사랑으로 이어졌다. 그의 경험을 통해 쌓여온 은혜의 간증은 중학교 시절 배운 기타로 더 빛을 발하기 시작했고, 다시 색소폰으로 이어졌다.


“소외계층의 심금을 울릴 수 있는 악기가 무엇일까 고민하다가 색소폰이 사람의 음성과 가장 비슷한 소리를 낸다는 걸 알게 됐지요. 색소폰 배울 수 있다면 내 개인의 유익한 도구로 쓰는 것이 아니라 복음의 나팔로 사용하겠다고 하나님 앞에 약속 했지요.”


술과 스트레스로 쓰러진지 10년 뒤 병이 재발해 췌장 3분의 2를 잘라내는 대수술을 받았다. 그리고 다시 10년 뒤인 지난 2007년 그는 인공췌장기를 달고 생활하며 인슐린을 투여 받고 있다. 그의 예상대로 색소폰 사역은 많은 이들의 마음을 위로하며 복음선교의 좋은 도구로 사용됐다.


그의 복음열정은 내부에서도 빛을 바랐다. 부임되는 곳마다 기독신우회를 조성해 각종 봉사와 기도모임을 주도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본이 되기 위해 자신의 일에도 최선을 다했다. 민생치안과 복음사역이 조화를 이뤄야 한다는 그는 월드컵 당시 사복경찰제도를 도입해 큰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국내외적으로 나라와 하나님 나라를 만방에 알리며 위상을 세우는데도 앞장섰다. 오는 6월 30일 정년퇴임을 앞둔 최동규장로. 그는 직장인으로서, 공직자로서 가져야 했던 시간적 제약 등에서 벗어나 하나님 일을 자유롭게 할 수 있게 돼 벌써부터 행복하다고 고백한다. 하나님이 주실 새로운 산지에 대한 기대로 가득차있는 최장로.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한 그의 복음 전도사역은 ‘색소폰 선율에 복음을 싣고’(요단)를 통해 더 큰 감동을 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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