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적 평준화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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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적 평준화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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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8.03.12 1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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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엽목사<기독교정화운동 대표>


분배의 원칙에 있어서 평준화라는 원칙이 적용되는 것을 사회주의적 제일 원칙으로 삼고 있다. 다시 말하면 잘사는 사람 못 사는 사람 없이 고르게 산다는 정신이다.

 

마르크스의 이론에 있어서 이 원칙은 그의 경제철학의 근본 원리였으며 이것이 발전되어 나아가 사회주의에서 공산주의까지로 발전된다.

이 원칙 곧 분배를 평등화 하는 원칙은 성경의 원칙이기도 하다. 가난한 자, 억눌린 자가 없고 고르게 잘 사는 사회의 이상은 그리스도의 그것과 합치된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에서 자세히 살펴보면 원칙은 같되 그 시행 방법에 있어서 정 반대인 것을 볼 수 있다. 성경에서 말하는 평등적 분배원칙은 인휼과 자비라고 하는 자발적인 나눔에 의한 것이지만 마르크스 주의자들에 의한 분배원칙은 강제이며 혁명에 의한 것이다.

이 강제와 혁명의 근본 정신은 증오의 정신에 입각한다. 다시 말하면 잘사는 놈의 불의한 축적은 허용 할 수 없다는 정신이다. 그러므로 분배는 강제성을 띠지 않으면 그 실천이 불가능하고 이것을 국가적 차원에서 시행하는 것이 공산주의 국가였다. 러시아의 볼셰비키 공산주의 혁명을 비롯해서 공산국가의 혁명은 언제나 강제를 앞세운 피의 숙청을 전제로 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피의 숙청을 자행함으로써 그 목적을 달성 할 수 있었는가의 반성에 있어서 생각하면 초기에는 달성한 듯 보였지만 결국은 실패한 것이 1980년대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제 한국 정부에 있어서 과거 10년간은 이 평등적 분배 원칙이라는 원리로 정책을 펴 왔었다. 여기에서 많은 부작용들이 발생했다. 경제적 평준화, 노동의 평준사상, 기회의 평등화 심지어는 교육의 평준화까지 그 정책이 시도되어 왔고 이제는 그 허점을 보완하고자 화는 몸부림에까지 이르렀다. 과거 10년을 우리는 그 근본정신에 있어서 나무랄 수는 없다. 가난한 자 억눌린 자 억울한 자에 대한 배려는 기독교적이며 그리스도의 교훈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시행방법에 있어서 착오가 있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이제는 다시금 본 궤도에로 회귀 하여야 할 시점에 왔다고 본다.

전술한 것처럼 성경적 방법은 모든 평등화 평준화의 시행 원칙은 증오감정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가페적 사랑 위에서 시행 할 것을 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인애의 원칙하에서 그 이상이 이루어지려면 개인의 인권, 능력, 가치를 존중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이제 우리는 경쟁의 원칙을 존중 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실제로 자본주의 사고를 사회주의적 관점에서는 증오하지만 성경은 자본주의 사상을 함유하고 있다. 무한 경쟁, 무한성공, 무한 자유를 허용하며 칭찬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새 정부가 들어섰다. 그리고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을 실용주의적 사고로 진행하려 하고 있다. 국민들은 여기에 희망을 걸고 있다. 초과 달성이나 100% 성공을 기대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희망적이다. 왜냐하면 그 생산방법에 있어서 자유경쟁적이고 가능성적이고 성경적이기 때문이다. 새 지도자는 생산이 곧 균등분배라고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생산없이 분배에만 몰두하는 정책들은 그 이상은 탁월할지 모르지만 현실에 있어서는 논리적으로 불가능 하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 기독교에서는 그의 정책을 밀어주고 협조 하여야 한다. 계속해서 악의성 발목잡기나 비판은 자제하고 그의 능력을 기대해야 한다. 이렇게 해서 참으로 균등 평등 평준화를 달성하는 나라가 되게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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