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낭비
상태바
거룩한 낭비
  • 운영자
  • 승인 2008.01.23 16:0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철재목사<기독교한국성서하나님의교회 감독>

 

1956년 휫튼대 수석졸업자 짐 엘리엇과 4명의 동창들이 에콰도르의 식인종 아우카족의 전도를 위해 소형비행기를 타고 남미의 밀림 속으로 날아간 후 소식이 끊겼다. 식인종들에게 살해된 것이다. 그러나 철저한 증거인멸로 미국의 수색대들이 어떤 잔해도 찾지 못한 채 단순 실종으로 처리되고 말았다. 그러자 미국 사회가 이런 젊은 인재의 손실이 얼마나 큰 국가적 낭비냐고 교회의 무모한 선교를 비난하고 나섰다.

이에 분개한 짐 엘리엇과 희생자 부인들이 전도단을 조직하여 아우카족 선교에 새롭게 도전하여 마침내 그 식인종들을 개종시켜 크리스천 부족으로 만드는데 성공한다. 거룩한 분개와 거룩한 낭비의 결과다.

선교는 어느 시대 어느 곳에서고 거룩한 낭비의 결과다. 장래가 촉망된 명문 휫튼대 수석 졸업생과 친구들의 생명과 꿈과 그 가족들의 희생은 언뜻 보아 크나큰 사회적 낭비처럼 보이지만 하나님 눈으로 보면 위대한 선교적 열매를 위한 씨앗이 되고 밑거름이 된 거룩한 낭비다.

자본주의의 비극은 이익의 극대화를 위해 정글의 법칙이 정당화되는 성장지상주의의 시장경제 원리다. 효율이란 이름으로 능률이란 이름으로 생산성과 이익의 극대화를 위해서는 인간의 존엄성도 도덕적 가치도 전통적 윤리도 모두가 사치스러운 낭비물이라는 것이다. 경제 제일주의가 정치 경제 문화 교육 등을 지배하면서 우리사회의 모든 전통의 가치를 매몰시키는 쓰나미 현상을 일으키고 있다. 교회도 예외일 수 없다. 1960년대부터 시작된 산업화의 바람이 성장 지상주의라는 토네이도가 되어 1980년대에는 마침내 교회의 종소리를 침묵 시키더니 이제는 십자가의 종탑마저 삼켜 버릴 기세다. 이번 대통령 선거에서 보듯이 경제는 최우선 가치로써 국민 성공시대의 목표요 기준이 되어 버렸다. 도덕적 윤리적 가치는 경제 지상주의 사회에서는 낭비의 요소일 뿐이다.

그러나 이것을 알아야 한다. 교회의 종소리가 수면 장애를 일으키는 낭비가 아니라 잠자는 영혼을 깨우는 생명의 소리가 되어 우리 사회의 도덕적 가치를 지켜주는 파수꾼이 되고 있음을. 십자가의 붉은 빛이 고유가 시대의 전력 낭비가 아니라 죽은 영혼을 살려내는 생명의 피가 되어 창조적 질서를 회복시키고 사회적 윤리의 등대가 되고 있음을. 교회는 이 거룩한 낭비를 계속해야 한다.

문제는 한국 교회가 경제지상주의를 닮아 성장제일주의로 가고 있다는 점이다. 교회당 건물부터 세속화되어 기능성과 효율성을 중시함으로 불필요한 종탑은 없애고 모든 문화적 콘텐츠를 수용하기 위해 극장식 또는 체육관식의 건물을 짓고 있다. 예배가 목적이 아니라 문화가 목적이 되고 있다. 교회건물의 다양한 활용이 교회 주변의 이웃을 위한 봉사라고 한다. 그러나 예배가 목적이 아닌 건물은 더 이상 예배당이 아니다. 일주일에 한번 예배 보기 위해 도심의 비싼 땅에 비싼 건물을 짓는다는 것은 낭비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 낭비는 세상의 어떤 가치보다 귀중한 영혼을 위한 거룩한 낭비다.

한국 교회의 개혁은 교회의 거룩성을 회복하는 이미지 쇄신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종탑을 다시 세워 세상의 고난 받는 자들을 향해 소망의 종을 쳐야 한다. 가진 자들과 지배계급의 오만한 자들을 향해 경고의 종을 울려야 한다. 예배당은 예배를 위해 거룩한 낭비를 해야 하고 새벽예배로 인해 노동의 효율성이 떨어져도 거룩한 낭비를 계속해야 한다. 교회의 거룩성의 부활을 위해 아낌없는 교회의 거룩한 낭비가 먼저 부활해야 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